<한국 문화재 수난사>(59) /
경천사 10층 석탑(敬天寺 十層石塔) 수난 전말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 / 해체 전 경복궁] 국보 86호
1907년 <대한매일신보> 고발 및 논평 속보 전문
이 책 본문의 ‘경천사 10층 석탑’ 비화는 1972년 당시(<서울신문>에 연재 집필할 때)의 조사·취재 범위에서 그 탑이 1907년에 일본인 악당들에게 참담하게 당했던 수난의 내막을 밝힌 것이다. 고려시대의 그 걸작 대리석탑 약탈의 장본인은 1906년 12월에 한국에 특사로 왔던 당시 일본 궁내 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 1843~1939)였다.
그러나 상세한 그 내막과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1976년에 ‘한국 신문 연구소’가 영인본으로 발간한 <대한매일신보>(1904. 8∼1910. 10)의 1907년 3∼6월 지면에서 나는 여기에 전문을 전재하는 경천사 탑 수난의 추적 고발 기사와 그를 민족적으로 분개한 논설의 속보들을 감명 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보도는 일제의 한국 침략 가속화와 일본인 악한들의 무법적인 민족 문화재 약탈 및 일본으로의 반출에 대한 엄숙한 항변이었고, 전체 한국인의 울분을 대변한 민족 언론의 통렬한 고발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충족시켜 준다. 그 당시에도 국내에서는 <대한매일신보>만이 그러한 항일 고발 기사를 정면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당시 <니로쿠신문>과 <만조보>가 경천사 탑의 일본으로의 불법 반출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언론들도 그 사건을 문제 삼았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음이 <대한매일신보>의 그 전재 보도가 확인해주고 있다. 반면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한국 국왕이 다나카 특사에게 그 탑을 기증하여 일본에 가져오게 되었다고 다나카가 거짓 보도를 하고 있었음도 <대한매일신보>에 밝혀져 있다.
한편 비운의 경천사 10층 석탑이 당시 경기도 풍덕군의 절터에서 주민들을 총과 칼로 위협한 일본인 악당들에게 마구 해체되고 일본 헌병의 비호를 받으며 개성 기차역으로 불법 반출되던 과정에서 군수가 주민들과 함께 분노하여 그 만행을 끝까지 저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불가항력이었던 당시 실정도 <대한매일신보>는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그 보도에는 경천사 탑의 피탈 상황을 알고 있던 내부(내무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은 당시의 무력했던 정부 실정도 통분스럽게 드러나 있다.
본문에서 밝힌대로 다나카가 국내외가 범죄시한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굴복하여 하는 수 없이 서울로 되돌려 보낸 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1919년 무렵 일이었다.
그 탑재들은 원위치의 복원 조립이 불가능하게 부분적인 파손이 너무나 심했다. 때문에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쌓아놓은 채 방치되다가 해방 후 1960년에 경복궁 동쪽 건춘문 안에 억지로 복원 건립이 이루어져 국보 8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런대로 그 위치에서 지난 35년간 위용을 빛냈던 경천사 탑은 수년 전부터 착수된 경복궁 자체의 대대적인 복원 계획 진행에 따라 1995년에 또다시 해체되어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연구소 전문가들이 현재 탑재들의 참혹한 상처와 파괴된 부분을 새로이 최대한 보수하는 작업이 실시되고 있다. 이 작업은 여러 해 걸릴 예정이고, 앞으로의 재조립 위치는 국립 중앙박물관이 신축·이전되는 용산의 박물관 경역으로 예정돼 있다.
다나카 자작 급 일탑... 1907년 3월 7일자 논설
일본에서 왔던 특사 다나카 자작이 일본 황제에게 한국 황제가 개성 부근의 경천사 10층 석탑을 선물하도록 욕심을 내다가 실패하고 말았음은 뒤에 기술하겠지만, 내무부에 줄이 있는 어떤 사람이 일본 특사에게 그 석탑 선물은 반드시 허락될 것이라고 확언하여 다나카 자작이 귀국하는 인사로 한국 황제를 뵈올 때에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명하였더니, 우리 황제께서 역사적으로 귀중한 그런 석탑을 내줄 의향이 없다고 거절하셨다 함은 특사의 흉계가 탄로 난 것이다.
그러나 엊그제 궁중에 들어온 보고를 들으니 흉악한 일본인들이 그 석탑을 어떻게든 약탈해 가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방금 접한 믿을 만한 보도를 빌건대, 삼사 일 전에 무기를 가진 일본인 130∼200명가량이 탑이 있는 곳에 급습해 와서 그 지역 관리자와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탑을 해체하여 개성 철도역으로 운반하고 다시 부산으로 실어갔다고 한다. 그런 약탈이 이루어질 때에 일본인 순사들이 철도역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보고는 개성의 지방 관리가 직접 알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법 행위는 일본인들의 횡포한 행동을 역력히 드러낸 것이며 한국 황제와 인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이 사실이 명확히 보도되는 것을 깊이 믿고 싶지는 않다.
만약 앞의 보고가 과연 사실이라면 다나카 자작의 사절이 우리 국민을 고의로 만만하게 본 것임을 누구나 확실하게 알 것이다. 한국 인민이 그 만행과 모욕에 능히 항거하여 일어설 것임은 이미 스스로 표시하였다. 만약 다나카 자작이 그 귀중한 석탑의 불법 반출을 기어이 해 간다면 그가 능히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사수 옥탑... 1907년 3월 12일자 잡보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 지역에 있는 경천사 탑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여 층(10층)이 되게 세운 수백 년 된 유물이다. 한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결사적으로 빼앗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옥탑 탈거의 속문... 1907년 3월 21일자 잡보
개성 쪽에 있는 옥탑을 일본인들이 약탈해간 사건은 이미 거론하였지만 그곳에서 방금 또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풍덕군 서면 경천리 읍내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던 그 탑은 고려 공민왕 때에 중국 원나라의 노국공주(魯國公主)가 공민왕의 왕비로 시집오면서 석탑재를 가지고 와서 세웠던 것으로 서울의 사동탑(원각사지 10층 석탑)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중국 원나라 재상 탈탈(脫脫; 1314~1355)의 원탑이다.
그 돌은 옥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돌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여 사동탑과 똑같다. 아래층에 조각된 인물상들은 무지한 부녀자들이 쪼아가 상처를 입었고, 위층의 인물상들은 온전하니 이는 6백여 년이나 된 유물이다.
지난 3월 6일에 일본인 수십 명이 많은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허락 문서도 없이 탑을 헌다는 사실을 군청에서 듣고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날은 탑을 헐기 위한 장목 등만 가져다 놓았고, 10일에 가보았더니 탑은 이미 다 헐려 달구지 여러 대로 거의 다 운반되어 갔고, 남아 있는 탑석은 40여 덩어리였다.
그 불법 반출 때의 정황을 자세히 알아보았더니 8일에 내부의 경무 고문 통역관 와타나베 등이 석탑을 조사하려고 내려왔다기에 군수가 같이 가서 하루 머무르며 그 운송을 금지시킴과 함께 인부들은 쫓아 보냈고, 만일 내부에서 허락 문서가 도착하면 그 뒤에 실어가는 것을 논의하자고 말하고, 그 즉시 그 문제를 개성 이사청 경부가 하기노에게 조회하고 또 내부와 도에도 보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네사람 수십 명을 불러내 며칠이라도 산에 올라가 탑을 지키라고 하였더니 일본인과 인부들이 다짜고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탑을 헐어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가니, 동네사람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하기에 군수가 현지에 달려가 보았더니 완전히 실어가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관리들에게 들으니 작년 가을에 성명을 알 수 없는 감리자가 일본인 승려 아유가이·다이엔·에묘의 청원을 받아 탑이 섰던 경천사 터에 사찰을 새로 세우겠다더니 이번 일도 일본인이 아유가이 등을 시켜서 저지른 것이라고 한다.
갱론 도취 옥탑... 1907년 4월 13일자 논설
다나카 자작의 사절이 개성 근방의 옥탑을 탈취해 간 사건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엊그제 <서울 프레스> 신문(일제 통감부가 발행한 영자지)에 개탄한 바 있으니 우리 <대한매일신보>의 사건 폭로를 그 신문이 받아준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그 기자의 비탄과 그 논조가 자못 솔직하였다. 따라서 본 기자가 그 내막을 재론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인은 거짓 사과를 잘 하는 만큼 이 옥탑 사건을 만약 엄밀하게 밝히지 않으면 그런 사태는 오늘처럼 이어질 것이다. 생각건대 한국은 옥탑을 잃고 한탄을 얻었으나 일본으로서는 옥탑을 얻고 잃은 것은 없게 된 것이다.
<서울 프레스>가 보도하기를 만약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후작이 한국에 있었던들 이런 못된 짓은 반드시 없었을 것이라 하였고, 일본인의 그 불미스러운 행위를 가볍게 거론하려고 하면서 일개 일본인으로 진기한 물건을 사고파는 자를 이번 문제에 끼어 넣어 옥탑을 옮겨가려고 음모한 자는 그 상인이라고 꾸며대고 있다. 또한 이미 꾸며댄 말도 있다. 다나카 자작이 이 문제를 한국 내부 대신과 궁내부 대신에게 말하여 동의를 얻었다는 것이고, 그 대신들은 통해 황제의 허락도 얻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기자가 요 전날 쓴 바와 같이 황제에게서 그런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나카 자작이 귀국하는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에 황제가 육백여 년의 그 고적을 옮겨가겠다는 것을 들어주었을 리 만무하고, 설령 옥탑을 선물로 삼기로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황제의 본뜻의 아니었을 것임도 일본 사절도 역시 알았을 것이다. 결국 재난을 당한 옥탑의 탈취자는 그를 반출해 가면서 실컷 즐거워했을 것은 역시 뻔한 일이다.
우리가 탐문한 바로는 그 반출자는 전보 통신과 철도관청의 협조를 받았고, 무장한 자들을 데리고 가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 때 철도관청 사람들이 해체한 옥탑 전부를 기차로 실어갔다는 데도 그 사실을 전보로 내무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다.
만약에 이토 후작이 한국에 있었던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혹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 말이 어찌 한국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후작이 한국에 와 있는 일본 사람을 대신하여 어떻게든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면, 그가 자주 한국을 떠나 있을 때에도 적합한 사람으로 대리 권한자를 정했어야 한다.
기자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이뿐이 아니지만 다만 옥탑을 완전하게 도로 갖다 놓을 것을 권고하며 이 글을 맺는다.
옥탑과 급 기 행상, 1907년 4월 19일자 논설
근래에 서울에 풍설이 나돌고 있다. 얼마 전에 도둑질해 갔던 옥탑을 당장 도로 가지고 와서 일본인들이 무참하게 멋대로 옮겨간 그 자리에 다시 세워놓는다는 것이다. 이 풍설을 항상 요긴하게 탐문하는 곳에 입수된 것을 우리가 알게 됐는데 이로써 통감부가 과연 하나의 자혜로운 일을 능히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믿을 만한 희망은 약간 있다.
그 옥탑을 되돌려 주는 것을 자혜로운 일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여러 사례에서 이미 말하고 행동한 뒤에는 누구도 그들을 시켜서 번복할 수 없었음을 우리가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때문이다. 따라서 그 되돌아옴은 자혜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만하지만, 그러나 그 옥탑이 실제로 되돌아 왔을 때에는 그것이 순전히 저들 스스로의 결정이었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으랴.
생각건대 그 일은 만약 <대한매일신보>의 격론과 일본 <크로니클 신보> 지상에 흘법(서양인 이름) 씨의 비판론이 없었더라면 이미 잊혀 지게 됐을 것이고, 한국인은 그 옥탑 때문에 탄식만 했을 것이다.
이 옥탑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주시할 것이 있다. 첫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후작이 그의 통감부 소속과 그 밖의 일본인들이 한국인 소유물을 저들의 소유물처럼 마구 차지하려는 태도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한인에게 표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인 수없이 마구 차지한 일이 결국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또한 염두에 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인민이 일본 군인들에게 강점을 당한 토지도 혹시 적절한 보상을 받을만한 희망이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주권도 다시 되돌려 받게 그들이 소유한 우편 및 전신과 재정, 기타 여러 가지를 일본 정부가 처리해 줄지 모른다는 몽상 또한 있을 수 있다.
일보의 옥탑기... 1907년 4월 23일자 잡보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제9006호 보도에 옥탑 사진이 실려 있고, 그에 대한 기사가 장황한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경천사 탑은 도쿄 박물관 앞에 세워졌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 자리에 세워져 있고, 또 하나는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인 임진왜란 때에 가토 기요마사가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오고 싶어 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성 대신의 귀에 들어가, 그 두 탑 중의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그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은 우리 일본 미술계를 위해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고, 지난번 사절로 갔을 때에 조선 국왕에게 그를 간청하였던 바 한국 정부 측이 그 뜻을 이해하고, 이번에 조선 국왕께서 우리 궁내성에 경천사 탑을 기증함으로써 박물관 앞에 세우고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운운.
탑 형태의 대략
탑의 높이는 약 4장 2척, 회백색 대리석의 13층(정확히는 기단 3층 위로 10층)으로 만들어졌다. 위의 5개 층에는 4면에 불상 셋씩이, 중간 2개 층에는 불상 다섯씩이, 그리고 밑의 5개 층(기단 포함)은 12면으로 조성돼 있는데(기본적으로는 +자형), 그 각 면에도 불상 셋씩이(실제는 보살상들도 곁들여져) 조각돼 있다. 맨 위의 상륜부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다. 탑의 현판석(1∼3층)에는 각기 화엄회, 대동 금석문, 원나라 역사, 풍덕읍지 및 금음집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어 기이함이 넘친다. 또한 관음보살이 불법을 강론하는 형상도 있으니, 그 보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가치를 말한다면 한국의 공채(일본에서 빌은 국채=외채)의 태반을 저당으로 잡힐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기자의 보탬 말
일본인이 옥탑을 도둑질해 간 사실을 거론한 일이 여러 번이었지만 개성군에 사는 한계명 씨가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을 보다가 위와 같은 기사를 읽고 분통을 참을 수 없어서 그 신문을 우리 <대한매일신보>에 보내주었기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여기에 게재하니 애독자 여러분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한국 보탑 문제... 일본 이륙신문 역등. 1917년 6월 4일자 별보
최근에 도착한 외신을 빌면 미국에서는 한국의 보탑 문제로 떠들썩한 논평을 불러일으켰는데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의 구로키 대장은 신문기자들의 접근을 일절 사절하였다고 한다. 다음에 그 사실의 진상을 소개한다.
보탑이라면 어느 탑을 말하는가? 문제가 된 보탑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5층탑(10층탑의 잘못된 기록)인데 높이가 9척 2촌(42척의 잘못된 기록)이고 기가로 말한다면 수백만 원에 이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6백 년 전의 잘못된 기록)에 중국에서 한국에 기증한 둘 중의 하나인 그 보탑은 한국의 역사적인 보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무지한 한국 사람들은 그 탑의 돌가루를 먹으면 어떠한 중병이라도 당장 낫는다고 맹신하며 ‘약옥탑’이라고 부른다.
문제의 발단
문제가 된 경위를 알아보았더니 저번의 한국 황태자 책봉 의식 때에 우리(일본) 황실에서는 다나카 궁내성 장관을 특사로 보낸 바 있는데 그는 옛날 물건을 애호하는 습관이 있어서 욕심을 참을 수 없었던지 일·한 양국 친교 기념물 명목으로 앞에 말한 두 보탑 중의 경기도 풍덕군에 있는 것을 간청하여 얻었다.
가져온 자와 의문점
그 백옥탑을 다나카 궁내성 장관에게 기증하였는지 또는 억지로 일본 황실에 기증하였는지 이미 의문스럽다. 일본과 한국의 친교를 위한 기념물로 한국 황제가 일본 황실에 기증하였다면 상당한 예절의 격식을 거쳤어야 하는데 기증 문서 하나가 없고 사절 한 명도 없었으며,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일본인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것은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다.
일본에 가져온 과정
다나카 궁내성 장관이 백옥탑을 일본에 가져온 과정을 적어 보면 올해 2월 4일,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후쿠오카 현 출신의 곤도라는 자가 헌병들을 데리고 풍덕군에 나타나 보탑을 헐어가려고 하자 군수 등이 그를 허락하려 하지 않았고, 주민들 중에서도 강력히 항거하려는 사람이 나오자 부득이 약간의 무력을 쓴 뒤에 보탑을 결국 해체하여 인천으로 운반하였다. 3월 15일에는 도쿄의 신바 시에 도착했고, 19일에 우에노 공원 안의 재실 박물관으로 운송되었다.
보탑의 현재
재실 박물관에서는 어떤 명령이 있기 전에는 보탑의 해체 포장물들을 엄밀히 보관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친목을 기념한 그 보물도 현재는 박물관 경내의 한 구석에 포장된 채로 보관돼 있으며, 누구도 그 실물을 보는 영광을 갖지 못했는데 바다 건너 미국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앞으로의 조치
이 사건에 관하여 당국자는 속히 그 탑이 일본에 오게 된 자초 지정을 공개하고, 천황이 본 뒤에는 일반인들도 관람케 하여 한국 정부에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만약에 탑을 가져온 절차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다나카 대신이 불가불 책임을 지어 두 나라 황실에 누가 미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옥탑 탈거의 전말... 1907년 6월 4∼6일자 잡보
풍덕군 서면 경천리는 개성과의 경계에 있다. 그 마을 뒷골짜기에 경천사가 있었으며, 그 절 앞에 12층(정확히는 3층 기단 위로 10층) 옥탑이 서 있었다. 그 탑신에는 12진상(불상 보살상)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으며, 탑의 높이는 10장(100척)이다. 그 한 면에는 ‘지정 8년 경천 축원 위황제 황후태자’의 15자가 새겨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法輪常轉(법륜상전)’ 네 글자가 옆으로 새겨져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중국의 원나라 재상 탈탈이 불탑을 세우기를 원하여 진녕군(晉寧君) 강융(姜融; ?∼1349, 고려 충선 충숙왕 때의 공신)이 원나라의 석공 장인을 데려다가 이 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석재의 품질은 옥 같으면서도 옥이 아니고, 돌 같으면서도 돌이 아니다. 물속에 있던 돌이라고도 하며,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단하고 그 색은 연한 푸른빛이니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공주가 노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절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탑만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목동들이 날마다 건드리고 상처 내어 밑의 5층(기단부 2층 포함)은 조각 형상과 글자 획이 많이 손상돼 있다. 그렇더라도 6백 년 전래의 유물로, 국가적으로 참으로 애석한 상태이다.
지난 가을에 일본인 중 다이엔·아유가이·에묘 3인이 나타나서 군수에게 청원하기를 “우리들이 경천사를 중축하고 탑을 보호하겠다.” 운운하였다.
그래서 “그런 일은 내무부의 소관이다. 그러니 내무부에 가서 말해보라.”고 이르고 돌려보냈더니 며칠이 안 되어 또 와서 청원하기를 “내무부 지시 속에 민가와 무덤들의 피해가 없겠는지 소상히 보고하라 하였으니 즉시 밝혀 보고하시오.” 하기에 부득이 별로 피해가 없겠다고 즉시 내무부에 보고하였으나 아직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광무 11년(1907) 2월 21일에 현지 군수가 경천리 마을의 보고를 받아보았더니 일본인 수십 명이 탑 근처에 몰려와서 천막을 치고 장목과 볏짚 등을 실어다 놓고 탑을 헐려고 한다고 하길래 당장 경찰관과 군청 서기를 보내어 일본인들의 간계를 들추어 보려고 하였더니 일본인 수십 명이 수상하게 움직이다가 탑을 허는 일을 멈추었다. 그 행위를 따져 물었더니 칼을 휘두르며 맞서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내무부 경찰 고문의 통역인과 와타나베 타카직로가 탑이 헐린 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하므로 군수가 말하기를 “사전에 허락한 문서가 접수된 바가 없는데 마음대로 헐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찌된 짓인가, 즉시 가서 중단시키라.”고 하였더니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유물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관리 한 사람을 데리고 빠른 시간 안에 현장 조사를 하고 허는 일은 중단시킨 뒤에 와서 말하겠다.”고 하기에 군수가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그 고적 유물은 우리나라 지역 기록에 소상히 실려 있어 동양에 알려져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폭력적으로 헐어가려고 한다면 그 사태를 막아야 하는 책임은 군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천리에 달려가 보았더니 개성 경찰지서의 경부 안토 도모쿠마가 역시 먼저 조사를 하러 와 있었다. 와타나베 및 안토와 함께 탑이 있는 곳에 가보았더니 전날 밤 사이에 몰래 다 헐어버려 해체된 탑재들을 짚자리로 묶어 포장한 것이 40여 덩어리였고, 깨져서 버려진 조각들이 또한 적지 않았다. 산골짜기 입구로 줄지어 탑재를 실어가려는 달구지가 넷이나 되어 군수가 그 주동자를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주동자는 서울에서 오지 않았고 단지 현장 감독자 몇이 와 있다.”고 하기에 다시 와타나베에게 그 내막을 알아봐 달라고 하였더니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여기 와서 처음 들어보았더니 일본인 중인 점패가 실제 주동자로서 당국에 진작 청원하였으나 내무부에서 승낙을 피하고 있다.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탑을 헌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승낙 문서가 곧 내려오게 할 것이니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군수가 통역인 및 와타나베와 현장 감독자라는 자에게 말하기를 “허가 문서가 도착한 다음에 실어감이 마땅하니 지금 실어가려고 묶어 놓은 탑재들은 우선 다시 풀어놓고 인부들은 돌아가게 하라.”라고 했더니 와타나베가 감독자라는 자에게 이르기를 “만일 그래야 한다면 주동자가 오지 않고 현장 감독자가 전담한 일이니 오늘 달구지 4대가 공친 손해비는 감독자가 책임지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수가 또 말하기를 “만일 허락 문서를 갖고 실어간다면 상대방은 누구인가. 손해금은 주동자와 감독자가 지출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와타나베가 대답을 못하자 즉시 감독자를 시켜 달구지 위에 실려 있던 여덟 덩어리의 탑재를 풀어서 한 곳에 모아놓고, 인부들도 되돌려 보내고 나서 한참 앉아 있다가 와타나베 및 안토와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세 관헌이 함께 현장 조사와 수송 금지 조치를 취했으니 마땅히 허락 문서가 도착한 후에나 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감독자에게 당연한 그 사유를 알아듣게 하여 다시는 잘못을 거듭하지 않게 함이 어떤가.”라고 하자 와타나베와 안토가 모두 응락하며 감독자에 그렇게 하라 이르고 다시 말하기를 “이처럼 귀국 관인이 감시하고 있는데 감독자가 무슨 일을 또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염려할 것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군수가 먼저 일어나 경천리로 돌아가고 서기와 마을의 동장을 시켜 현장에 달려가 다시 동정을 엿보고 보고하라 이르고 관아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서기와 동장이 보고해 오기를 “여러 관헌이 돌아가자 감독자가 다시 당장 탑재를 실어가려고 들면서 말하기를 ‘만일 실어가지 못하면 손해가 적지 않다. 따라서 불가불 급히 실어가야 한다. 남은 돌들은 앞으로 허락 문서를 기다려 가져갈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하기에 동장이 꾸짖어 말하기를 ‘비록 한 조각 돌이라도 손대선 안 된다. 눈을 속여 실어가려고 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경고하며 절대로 못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수십 명의 불법적인 무리가 칼을 빼들고 우리를 위협하기에 끝까지 항거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어서 군수가 그 간악함에 분통하면서 다시 동장에게 말하기를 “마을에 있으면서 막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사람을 수십 명 데리고 가서 며칠이라도 교대로 지켜보고 그래도 약속을 어긴다면 즉각 달려와 보고하라.” 하고 군수도 즉시 경천리로 가려고 떠났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마을의 보고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새벽에 몰래 남아 있던 탑재석을 달구지 수십 대에 싣고 이미 급하게 떠나버렸으니 그 과정에서 동민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막으려고 했더니 일본인 사오십 명이 각기 총검을 들고 시위를 하며 달구지를 좌우에서 호송하는 바람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군수가 즉시 달구지 바퀴 자국을 따라가 보았더니 이미 개성의 기차 정거장에 이르러 가지런히 쌓아놓고 포장된 덩어리마다 ‘궁내성에 보내지는 물건’이란 표지가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개성에 있는 일본 관할 기관에 달려가서 경찰관 하기노와 와타나베를 만나 항의하기를 “나 역시 막지 못한 것이 잘못이지만 그것이 운반될 적에 총검이 달구지를 에워싸고 있었으니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막으려고 했더라면 많은 사람이 구타를 당하고 상해를 입는 굴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아키노는 “비록 허가 문서 없이 헐어갔더라도 하는 수 없다. 그 탑은 이미 다 운반되었고 현재 기차에 실려 떠나게 된 마당이니 서로 책임을 따져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대 군수는 이 사실을 귀국 내무부에 보고하면 될 것이다.”고 했다.
한국 보탑 문제의 속론... 1907년 6월 5일자 별보
풍덕군 보탑 사건에 대하여 우리 <대한매일신보>는 거듭 별론한 바 있지만 그 사실이 동서 여러 나라에 알려져 미국의 여러 신문에서도 크게 논평되었으며, 일본의 <만조보>와 <이륙신문>이 또한 공평한 해설로 그를 비평하고 있다.
어제 날짜(6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이미 일본의 <이륙신문>의 논평을 특별히 옮겨 소개했지만 다름 아닌 일본인이 쓴 그 사건 논평은 일본의 간악한 짓을 감싸려고 하면서 말한 것인데도 그 정도였으니 하물며 세계 각국의 객관적 논평은 어떠했겠는가?
무릇 일본인의 강압적인 행위와 교묘한 속임수의 수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들이 위협 또는 유혹으로 한국인 소유의 물건을 크건 작건 가리지 않고 무법적으로 탈취해 간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번 옥탑은 6백 여 년이나 된 고적일 뿐 아니라 그 정교한 조형미는 과연 미술적 보물이어서 그 가치는 수백만 환으로 계산될 수 있다.
저번에 다나카 자작이 일본 황실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건너왔을 때에 오직 고물을 탐내는 욕심으로 그 옥탑을 가져가고 싶어 했으나 한국 황제 폐하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한국 정부의 승낙도 받을 수 없었다.
이른바 고물상인 곤도 사고로라는 자가 헌병들과 철로 역부들을 거느리고 그 탑이 있는 곳에 가서 밤을 세워 탑을 헐어 몰래 실어갔으니 그 행위를 어찌 도둑질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한국 황제 폐하의 허락하심과 한국 정부의 승낙이 없었더라면 정당한 예의의 절차와 명백한 공문이 확실하게 있어야 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지금껏 양국 황실 사이의 정중한 말이 없었으며, 한국 정부가 지시한 문서가 그 군에 보내진 바 없고, 그 지방 관리들이 왜 저항하였으며 마을 주민들이 왜 탑을 지키려고 했고, 일본인 사오십 명이 왜 칼을 휘두르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는가?
그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인의 논평이 비록 교묘한 말과 수식어로 분장하여 천하의 이목을 속이려 한들 과연 그렇게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서울에서 발간되는 <서울 프레스>가 일본인의 언론기관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번 사건에 이르러서는 <대한매일신보>의 비판적 보도를 받아들여 ‘일본 이토 후작이 만일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하였고, 다나카 자작은 일개 상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하니 그 불법 행위의 사실을 <서울 프레스>도 숨길 수 없다고 자인한 상태임이 확연하다.
하물며 <만조보>와 <이륙신문>에 격렬한 논박과 공평한 해설이 잇따라 실렸고, 미국이 여러 신문의 논평이 또한 그렇게 자자하였으니 6백여 년 전래의 고적이자 수백만 환 가치의 이 보물을 도둑질해 간 사실이 천하에 폭로되었고, 만세를 두고 그것은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일본에 가 있는데 따른 막대한 오명을 어찌 씻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 올바른 조치는 오로지 그 보탑을 한국에 되돌려 보내어 기왕의 잘못을 사죄함으로써 양국 황실의 우의를 더욱 돈독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한국에 대하여 상응한 가치의 물품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이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보탑이 일본의 박물관에 있는 것이 영예가 되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으로 무수한 수치가 될 것이니 일본 당국자는 잘 깨닫고 반성하여 올바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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