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32) /
식민지 연구 자료로 이용된 규장각 장서(奎章閣 藏書)
한일합방과 함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 재산 중의 가장 귀중한 문화재는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방대한 분량의 고서와 지방의 사고본(史庫本)들이었다. 당시 규장각은 경복궁(景福宮) 동쪽의 건춘문(建春門) 맞은편인 지금의 국군 통합 병원 자리에 있었다.
경복궁 안의 집옥재(集玉齋)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전적 문화재들은 외세 침입과 매국 정객들의 창궐로 국력과 조정의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지던 19세기 말 이후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먼지와 습기 속에 방치된 상태였다.
대한제국 정체의 여러 분야의 무력과 마비 상태는 이 땅의 완전 식민지화와 국토 병합을 음모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정황이었다. 한일합방에 앞서 소위 통감부가 속셈을 감추며 행정력을 발휘한 것의 하나가 먼지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규장각 장서의 정리 및 보존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 통감부는 일본인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국내 학자의 협력을 받아 규장각의 네 서고에 가득히 쌓여 있던 옛 책들을 전부 밖으로 꺼내면서 먼지도 털고 일광 소독도 시켰는데, 그 때 처음으로 파악된 장서 내용은 뒤에 <규장각 폭서 목록(奎章閣 曝書目錄)>이라는 책자로 간행되었다. 그 무렵 통감부는 창덕궁(昌德宮)에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창설한 것처럼 또 이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제실 도서관을 설치시켜 준다고 통감부 아래 임시 취조국을 두고 여러 곳의 옛 책들을 낱낱이 조사하게 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 도서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규장각 장서 중에 ‘帝室圖書之章(제실 도서 지장)’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들이 있는데, 곧 일제 통감부 시절의 경위를 말해주는 증거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과거의 한국 왕실을 총독부 산하의 이왕직 관리 기관 속에 봉쇄시켰고, 또 과거의 한국 정부 재산과 왕실의 개인적인 재산을 분리시키면서 규장각 장서들을 총독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다 1931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시켜 일본인 교수들의 식민지 연구 자료로 삼게 했었는데, 해방 후 자동적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관이 되었다.
규장각을 비롯한 각처의 장서들을 모조리 접수한 총독부는 이왕가에게는 그전까지 건재했던 지방의 4대 사고의 하나인 전북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을 인수하도록 생색을 냈다. 주객이 뒤바뀌어 나라를 빼앗긴 이왕가는 침략자로부터, 5백 년 사직이 소중히 물려주고 있던 막대한 수량의 온갖 귀중한 사책들 가운데 <이조실록(李朝實錄)> 1질이 포함된 지방 사고의 장서 한 벌을 배정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도장까지 찍히면서였으니 모두 망국으로 인한 모멸이었다.
지금의 창덕궁 장서각은 그 때 이왕가가 무주에서 올려온 ‘적상산성 사고본’을 중심으로 발족한 것인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친일 매국배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경기의 풍성하고 어수룩한 재정 밑에서, 이왕직이 일본인 고관 퇴물들의 사복을 채워 줘 가면서 이왕가를 위하는 체 생색을 낸 일이었다. 그리고 그 때 창덕궁에 들여보낸 <이조실록>과 기타 사고본에 ‘무주 적상산성 사고본, 조선총독부 기증’ 이란 도장을 찍은 자는 뒤에 가서 총독부 도서관장을 지낸 하기야마였다. 그는 장서각 발족 당시 한동안 실무 책임자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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