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31) /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갈 뻔한 보신각종(普信閣鍾)
태평양 전쟁을 도발시켰다가 미·영 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마침내 자멸 위기에 몰리게 된 일본 국군주의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총후의 정신 협력’이라는 발악적인 전쟁 수행의 한 수단으로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선포했다. 일반 가정의 놋쇠로 된 숟가락·젓가락·밥그릇으로부터 사찰과 교회의 동종, 청동 혹은 철불, 기타 모든 종류의 금속 기물을 자진해서 헌납하라는 것이었고, 나중엔 강제로 빼앗아 갔다. 강화도의 전등사(傳燈寺)에서 전래의 동종과 불기들을 강제로 공출당한 것도 그 때였다. 경찰을 앞세운 협박적인 집행이었다. 완전히 공포 분위기의 악몽기였다.
[옛 보신각 동종] 보물 2호
같은 해, 서울에서는 종로의 보신각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앞잡이들이 그것을 지목했던 것이다. 1944년 8월 12일, 총독부의 앞잡이 단체였던 소위 국민 총력 경성 연맹 회장이 전체 조선 연맹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이 독촉·상신하고 있다.
“결전하(決戰下), 금속 회수의 강화 철저의 건 : 결전하, 금속류 회수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차제에 일반 대중은 정신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가의 보신각 대종, 총독부 청사 내의 동상(초기 총독상 2점이 있었다.) 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 져 있음은 당국의 진두수범상 일고를 요함. 기타 부내(서울 시내)에 있어서도 사원·교회 등 각 방면에 존재하는 금속류가 아직도 상당한 것으로 믿어지는 바, 그것들을 즉각 공출·처치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옛 보신각 동종] 보물 2호
보신각종의 위기일발. 그러나 이 종은 총독부가 1934년 8월에 보물로 지정하였던 어찌할 할 수 없는 문화재였다. 따라서 총독부도 그것만은 건드릴 수 없었다. 또 서울의 민족적인 민심을 크게 자극할 역효과를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보신각종은 병기창에 끌려가는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면한 채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오늘날엔 보물 2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 종로 네거리의 보신각종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처음 주조됐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에 의해 불 질러져 녹아 없어졌다. 현재의 종은 세조 13년(1468)에 주조되어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안의 정릉사(貞陵寺)와 원각사(圓覺寺)에 걸려 있다가 임진왜란 후 종각만 재건된 현 위치로 옮겨져 보신각종이 됐던 것인데, 과거의 왜병들의 후예에 의해 또다시 불 속의 죽음을 당할 뻔했으니 지금의 보신각엔 왜적에 대한 한스러움이 사무쳐 있을 것이다.
[전등사 철종] 보물 393호
한편 강화도의 전등사종은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당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해방 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중국 북송 때의 귀중한 종이 하나 굴러 들어왔다. 해방이 되자마자 전등사 주지는 일제에게 빼앗겼던 종이 혹시 인천 항구의 어디쯤에 버려져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 나섰다가 부평의 조병창 자리 뒷마당에 큰 동종이 하나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전등사에서 가져온 종은 아니고, 그보다 더 큰 대종이었다. 여하간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종이니 이거라도 대신 운반해 가자고 해서 얻은 것이 지금 전등사에 걸려 있는 높이 1.63m의 중국 종으로 1037년에 중국 백암산 숭명사(百巖山 崇明寺)에서 주조했다는 명문이 들어 있다. 1963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문화재임이 조사·확인되어 보물 393호로 지정되었다. 전등사의 중국 종이 해방 직후에 부평 조병창에 버려져 있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역시 일제 말기에 중국 점령 지역에서 배로 반출돼 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 보물 11-8호
강화군의 강화면 관청리에는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돼 온 또 하나의 큰 동종이 있는데(현재 보물 11호, 1711년에 주조), 이 종은 또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서울 근처까지 접근해 왔던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이 자기 나라로 실어 가려고 강화읍 서문 밖 토끼다리까지 굴리어 갔다가 너무 무겁고 운반하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는 비화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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