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20) /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葆華閣)의 부도와 석탑

문근영 2017. 2. 6. 09:12

<한국 문화재 수난사>(20) /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葆華閣)의 부도와 석탑



지금 서울 성북동의 간송 미술관(澗松美術館; 보화각) 뒤뜰에는 지난날 일제 밑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유린당했다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의 극적인 보호를 받은 행운의 석조 부도와 석탑이 세워져 있다.





먼저 부도. 원위치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이름을 잃은 절터에서 고려 중엽 이전의 양식을 갖춘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도를 본 일본인 악당들은 마을 사람 하나를 매수하여 그것을 공공연히 빼돌렸다. 시기는 1930년대 말. 곧 이 부도는 인천으로 옮겨졌고, 배에 실려 일본 본토로 팔려나가게 되는 최악의 수난에 직면해 있었다. 그것을 인천 항구에서 붙잡은 사람이 간송이었다. 민족 문화재 수호와 해외 유출 방지를 위해 막대한 사재를 아낌없이 그리고 가치 있게 투입하던 간송의 민족적 사명감은 당장 그 일본인 무법자와 대결하게 했다. 그는 일본인이 제시한 엄청난 액수를 즉석에서 지불했다. 부도를 실은 배가 인천에서 출항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극적으로 구출된 괴산 부도는 인천에서 보화각이 있는 숲 속에 옮겨져 소중히 복원되었다. 지금의 상태는 한국전쟁 때 쓰러졌던 것을 196423일 간송의 대기일(大忌日)을 기념하여 한국 미술사 학회의 전신인 고고 미술 동인회가 재차 복원한 것이다.


다음은 3층 석탑. 언제 어디서 어떤 일본인 악당이 반출했던 것인지 일체의 기록을 상실한 고려시대의 유물인데 이미 일본 본토로 팔려갔었다. 그 뒤 오사카에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을 때 서울에서 간송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 이번에도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사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놓아 가격에 구애받지 말고 낙찰시키도록 당부했다. 오사카 경매장에서의 응찰 경쟁자는 당시 일본의 어느 재벌이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막판에 가서 손을 들었다. 온갖 오욕을 당하던 석탑은 간송의 민족적 결의와 대담한 돈의 지원으로 다시 고국에 돌아와 역시 보화각 뒤뜰에 조용한 안신처를 얻었다.


간송은 평소 그가 손댄 장한 일의 내막이나 거기에 쓴 돈의 액수를 조금도 밝히려고 하지 않은 고매한 인격자였다. 따라서 앞의 괴산 부도나 일본에서 되사온 3층 석탑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돈을 지출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간송은 자신만의 지출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대신 과거의 그의 너그러운 인품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오사카 경매장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한 번 보지도 않은 3층 석탑을 무조건 되사오게 했던 일에 대해 간송은 뒷날 한 가까운 연구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재벌과 경쟁이 붙는 바람에 생각했던 이상으로 엄청난 값으로 낙찰을 보았으나 막상 일본서 실어다놓고 보니 기대했던 거와는 딴판이라. 허나 하는 수 없었지 어쩌나.” 그뿐이었다.


일제 밑에서 간송처럼 이 땅의 문화유산을 철저한 사명감과 신념으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지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면 악질적인 일본인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수법을 배워 민족 문화재를 도굴 혹은 불법 반출하여 일본인 사회에 팔아먹는 딱한 조선인 무뢰한과 그 앞잡이들이 1930년대엔 부쩍 늘고 있었다. 19358월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적발되고 있다.


경북 문경군 신북면 관음리의 폐사지에 서 있던 석탑을 서울 신용산에 사는 임장춘이란 자가 사서 운반 중이라는 바, 그러한 매매와 운반은 법령 위반임. 조사 보고 요망. 판 사람은 현지 관음리의 이 아무개. 손 아무개임. 임장춘은 석탑류 매매의 상습자인 배성관이란 자와 전부터 긴밀한 사이이나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임이었고, 배는 뒤에서 자금을 융통해준 간접적인 관계에 있음.”(총독부에서 경북 도지사 앞으로 보낸 서류)





현재 문경읍 경찰서 갈평 지서에 세워져 있는 관음리 5층 석탑이 바로 그 때 임장춘이 불법 반출하려다 실패한 석탑이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