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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문화재 수난사>(19) / 무법자들에게 유린된 석물들

문근영 2017. 2. 6. 09:11

<한국 문화재 수난사>(19) /

무법자들에게 유린된 석물들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고적 및 유물 보존 규칙>과 고적 조사 위원회 설치 규정은 그 전까지 방임되었던 일본인 무법자와 그들에게 나쁜 짓을 배우고 혹은 매수되어 움직였던 일부 조선인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 행위에 다소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행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던 깊은 산골짜기의 절터라든지, 한두 명의 허약한 중이 지키고 있던 몰락한 명찰, 그 밖에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유적지에서 그들은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물을 빼냈고, 그것을 딴 데 팔아 큰돈을 버는 불법 행위를 감행했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서 그들의 만행은 대개 뒤탈 없이 성공했다. 또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불법적인 이익과 귀한 유물의 소유욕을 충족시켰다. <고적 및 유물 보존 규칙>이 공포된 후 몇몇 경우가 적발되어도 일본인 관련자들은 이렇다 할 형벌을 받는 일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경우와는 달리 일찍부터 생활 주택의 정원과 조경에 배치하는 석물로서 불교문화의 고색 짙은 석탑과 석등을 진중히 여겼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 세력으로 이 땅에서 부를 누리게 되었던 많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정원에 조선의 아름다운 옛 석탑과 석등 혹은 부도를 들여놓으려고 한 것은 말하자면 자연스런 생심이었다. 그리고 이 생심이야말로 실제 불법적인 약탈 행위들과 공범 관계를 맺게 했고, 동시에 배후 조정 혹은 요청자로서 공모하게 한 것이다.


충남 보령의 이름을 잃은 절터에서 인천의 고노 다케노스케(河野竹之助)라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중간에 내세워 감쪽같이 5층 석탑을 반출해내던 무렵, 같은 인천에 살고 있던 우에하라라는 또 다른 일본인은 경기도 용인에서 3층 석탑을 실어다놓고 있었다. 1919년의 총독부 고적 조사 서류에서 그 사실이 짤막하지만 명확하게 씌어 있다.


그 탑은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창리 탑골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작년 말(1919)에 인천 축현으로 이전한 것으로 그 뒤 다시 현재의 장소인 산수정(지금의 송학동) 우에하라의 택지 안에 옮겨진 것임.”


혹시 이 탑이 1970년 초까지 인천경찰서 앞의 은행 관사 안에 있었던 3층 석탑과 같은 물건인지도 모르나 이미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인천에서 3층 석탑을 조사한 서울의 전문가들은 고려시대의 비교적 우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옛 절터의 석탑이나 부도 같은 역사 유물은 어떤 경우라도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불법적인 매매와 반출 또는 약탈이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모두가 일본인들이 직접 간접으로 감행한 것이었다. 다음은 1930년대에 적발된 몇몇의 확실한 사례이다.


1936년에 서울 돈암동 424에 살고 있던 닛타(혹시 뒤에 남대문 근처에 살며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을 사 갖고 있던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와 동일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가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절터에 있던 우수한 석탑 하나를 서울 자기 집 마당으로 반출했다가 불법 행위로 걸렸다. 같은 해 2월에는 군산에 살던 다케다라는 일본인이 이 모라는 조선인 앞잡이와 짜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3층 석탑을 100원으로 몰래 사서 군산으로 반출했는데, 불법적으로 그것을 팔았던 백철현이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매매를 취소한 후 원위치로 다시 옮겨다 놓았다. 또 같은 무렵에 전북 옥구군 개정면 발산리에 살던 시마다니 야소야(嶋谷八十八)라는 일본인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의 절터에서 우수한 5층 석탑을 무단 반출했다가 적발되었으나 석탑은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방 전까지 군산의 어느 농장에 이건 되어 있었다는 부여 숭각사 터의 3층 석탑과 관련이 있음직하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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