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수로왕릉(首露王陵)
전경
홍살문 입구
근경
입구
•지정 번호; 사적 73호
•소재지;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 93번길 26(서상동 312)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금관가야 수로왕(2세기), 조선 선조 13년(1580)
•분류; 능
•내용; 김해 수로왕릉은 김해시 서상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가락국[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의하면 대궐의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 능묘)을 지었으며, 높이 1장(丈), 주위 300장으로 그 곳에 장사를 지내고 수로왕 묘라 하였다고 한다. 능역 내에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2기가 있고, 가까이에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192호), 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341호) 등이 있어 가락 문화의 중심지 평지에 위치한 고분이다. 지정 면적은 6만 1,784㎡[약 18,723평]이다.
수로왕릉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 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있다. 규모는 직경 22m~21m, 높이 5m이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安香閣)・전사청(典祀廳)・제기고(祭器庫)・납릉 정문・숭재(崇祭)・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馬羊虎石)・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고려 문종 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 상태가 좋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했던 듯하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87 ‘기묘조’에 의하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 觀察使; 종2품) 이선(李宣)의 건의로 수로왕릉과 김해 수로왕비릉(사적 74호)에 대해,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표석을 세워 수호 구역으로 정하였으며, 1446년(세종 28)에는 다시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능묘의 수호 구역을 확대한 것이다.’로 나타난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580년(선조 13) 수로왕의 후손으로 경상도 관찰사 허엽(許曄, 1517~1580)이 상석(床石), 석단(石壇), 능표(陵標) 등의 석물을 시설하여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 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說)》 권19 ‘능묘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도굴을 당하였는데 순장(殉葬)이 있었던 것이다.’로 나타난다. 1647년(인조 25)에 능비를 세우고 1884년(고종 2)에는 ‘숭선전’이란 당호(堂號)를 내려 침묘(寢廟)를 개축하였고, 이때 안향각과 신도비각, 석수(石獸)도 설치되었다. 이후 196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보수 공사를 실시 정화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되었다. 《김해읍지(金海邑誌)》 ‘납릉(納陵)조’의 기록에 의하면 ‘지방민들이 동짓날에 제사를 지냈으며, 능을 지키는 능군(陵軍)과 제사를 모시기 위한 제전(祭田)이 있었다.’고 한다.
•특기 사항; 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내부 구조는 큰 석실묘(石室墓; 돌방무덤)로 추정된다. 가락국 수로왕릉의 상한은 학계의 여러 설을 감안할 때 AD 1세기에서 3세기 사이가 되고, 이 시기가 문화 단계로 볼 때 본격적인 고총 고분 이전의 단계여서 이 능이 대형의 목곽묘(木槨墓)일 가능성도 있으나, 이보다 앞선 단계로 근년에 발굴된 창원 덕산리 지석묘의 하부 구조를 참작한다면 규모가 큰 석실묘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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