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외 1편)
임동확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간다고 해도 저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한 눈동자
분명 처음이었는데도 늘 가까이서
지켜봤을 것 같은 예감에 휩싸여갔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진화와 창조의 세월 너머
언제 어디선가 해독되기를 기다리며 쏟아지는,
단 한 차례의 확률 같은 빗방울 하나가
홀연 무방비한 품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무도 맞설 수 없는, 제 운명을 떠밀고 가는 힘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가수의 노래에 술잔이 금가고
저를 밀고나가는 건
낡은 추억의 힘이 아니다
번개처럼 일순 반짝이는 것들이
석탄처럼 검은 심장의 박동을 일깨우고
이깔나무 줄기처럼 창백하게 곤두선
수직의 정신을 뿌리째 뽑아 던진다
단지 스치듯 마주쳤을 뿐인데도
결코 비켜가지 못했던 생의 한 순간처럼
전혀 그 파고波高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
잊혀진 격정의 한 시대를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돌팔매처럼 퍼져나간다
그렇듯 불현듯 눈떠보면
애오라지 어제는 어제일 뿐이다
마구 저를 흔들어대는
저문 봄밤의 파도 속에서만,
그 무한한 요동 속에서만 과거는
영원하고도 생생한 현재가 된다
미처 예기치 못한 혁명 같은
운명적인 마주침 속에서만,
유리 술잔을 깨뜨리는 벼락같은
가수의 노랫소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가 감당할 만큼의 역사와
동력을 갖추며 직립해 있다
공중을 나는 새들은 미래의 하늘을
차지하며 흐린 강을 건너가거나,
늙은 동백나무 군락들은 제 그림자를
얼싸안은 밤바다와 천둥처럼 소리치며
윤기 푸른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시집『태초에 사랑이 있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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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 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어국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졸업.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한 이래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운주사 가는 길』『벽을 문으로』『처음 사랑을 느꼈다』『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와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생성의 시학』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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