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 밀크 랜드의 체크무늬 코끼리
유형진
그녀는 사랑이 깨지는 순간을 본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을
그녀는 자주 목도(目睹)한다
사랑이 어떻게 깨지는지
깨진 사랑이 어떻게 가루가 되는지
가루가 된 사랑이 어떻게 녹는지
녹은 사랑이 어떻게 질척해 지는지
그 질척한 사랑이 그리는 마블링을
목도한다
녹아도 녹지 않고
깨져도 깨지지 않는
어떤 알갱이들이 만들어주는
그 오묘한 무늬를
체크무늬 코끼리
그녀는 본다
사랑의 마블링을 볼 줄 아는 그녀는
그래서 슬프고 아름다운데
정작 그녀를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세계의 비극
허나 이 세계의 비극은 이것 말고도
몇 개는 더 있는데
더 큰 비극은 그 비극을 이야기하기에 시간은
산장에 사는 검은 고양이의 털만큼
셀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시》2013년 1월호
-------------
유형진 / 1974년 서울 출생. 서울산업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송어 / 남길순 (0) | 2016.05.06 |
|---|---|
| [스크랩]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외 1편) / 임동확 (0) | 2016.05.06 |
| [스크랩] 익어 가는 것들은 왜 매달려 있는가 / 이승희 (0) | 2016.05.06 |
| [스크랩] 면류관 / 성동혁 (0) | 2016.05.06 |
| [스크랩] 도미노 / 함기석 (0) | 2016.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