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사티를 듣는 밤
최형심
에릭사티를 듣는 밤, 집집마다 마을이 있어 나뭇잎이 서성이는 창밖이 여섯.
음악이 흐르는 동안 이곳은 고요의 잠복기에 든다.
강의 심연이 한 방울의 빗소리로 내려온다.
강의 밑바닥을 생각하며 자주 눈을 깜빡거려야 할까 하얀 수련과 인연을 다하는 날,
우리는 옆으로 누워 문을 여닫는 수생의 뿌리가 될 것이다.
가난이 낙수 소리 곁에 가만히 앉아
어둠을 건너가는 신발의 무늬를 듣는다.
온밤 내내 비의 풍경에 흔들리는 공중의 마음이나 될까
꿈속까지 엄습해오는 외딴 섬과 돌 벽 틈새에
맹세를 묻은 이교도와 늙은 천문학자의 무릎으로 나가 소리의 밀거래를 만난다.
우리는 구전(口傳)의 부리를 가졌으나
흑백으로 조우할 수 있는 거리의 망명자가 될 것이다.
적막에 든 편지의 매립지에는 제 살을 벗겨 슬퍼질 수 있는 것들만 있다.
그리하여 긴 안부의 말을 묻기 위해 단어들에 음절이 생기면
정물화 속 흑점은 생멸하는 것들의 고해가 된다.
어깨가 들썩이는 풀빛을 위하여
빗소리의 밖까지 나가 귀를 묻을 때
온종일 문 앞을 서성이는 백발은 오래 흔들린 것들이다.
반복적으로 관절을 허무는 손과 꽃을 말하기에 게을렀던 입을 반성한다.
비로소 네 개의 거울을 빌려 사방이 되는 침묵이 거기 있다면
우리는 음과 음의 입술로 벌거벗은 강을 소요할 것이다.
별을 향해 떠나기 전
물질을 서두르는 천공의 한가운데,
나무가 갈라지며 날아오르는 새들의 소리가 고요의 내부를 소등하면
우리는 일찍 잠든 연인의 곁으로 가 밤이 되어야 한다.
—서울대〈대학신문〉2012. 10. 15 개교66주년기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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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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