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백서(외 1편)
김상미
아주 가끔은 우울하고 대부분은 명랑해요
사람들은 내가 명랑한 걸 좋아하지 않아요
명랑은 우울보다 격조가 더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명랑하고 싶어요
무엇에든 광적으로 집착하는 체질이 못 되거든요
광적인 집착은 병적인 우울을 낳지요
언제나 노심초사 전전긍긍
어디에서 불행이 오는지 어디로 행복이 달아나는지
쉴 새 없이 탐색하고 추적해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점점 명랑에서 멀어져 우울한 괴물로 변해버리죠
정말이지 나는 그런 거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단것보다 쓴 것을 더 좋아한 탓인지
여하한 고통 위에 또 고통을 세워 그 안에 아무리 사나운 북쪽 창을 달아 놓아도
내 열병은 시들 새도 없이 하루 만에 거뜬히 끝나 버려요
쓸데없이 진지하고 쓸데없이 합리적이고 쓸데없이 현실적인
값비싼 망원경 따위는 집착 강한 우울한 사람들에게나 모두 줘 버려요
나는 그냥 바람 부는 길가에 앉아 무언가가 다가오기를 기다릴래요
무언가가 다가와 황홀하게 나를 감동시켜 주길 원할래요
로댕의 대성당처럼 가우디의 카사 밀라처럼 언제든지 떠나고 싶은 지중해처럼
지로나의 내밀한 구시가지처럼 고야의 검은 집처럼 김정희의 아름다운 세한도처럼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뒤뚱뒤뚱 해맑은 어린아이의 단순 명쾌한 웃음소리처럼
오성의 드높은 담장 단번에 밀치고 들어오는 놀라운 명랑에
자연스레 내 온몸 빠져들기를 원해요
아주아주 오래된, 처음과 끝 같기를 원해요
너도나도 창백한 백합꽃 같은 우울에 매달려
격조 있던 본래의 심연 구기고 구겨 뒤틀린 철갑 같은
고상 찬란한 신종 우울증
끊임없이 생산해 내며 자랑스레 뻐기든 말든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언제나 명랑하고 싶어요
—《시와 표현》2012년 여름호 발표. (제2회『시와 표현』작품상 수상작)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변한다 모든 건 변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도 변하고 팀 버튼의 영화도 변하고
건장한 팔다리처럼 강직했던 내 의지도 변한다
아무리 연장자들이 삶은 변하지 않는다 소리쳐도
젊은이들은 언제나 불 주위로 몰려들고 활활 타는 불구덩이로 뛰어든다
원상복구라는 말은 이제 낡은 말이 되었다
그래도 늑대들과 노는 것, 아무리 외로워도 늑대들과 노는 것만은
아직도 꺼림칙하고 고통스러울 뿐
우연히 마주친 대선배의 냉랭하고 못마땅한 표정 안에 숨겨진 검은 의도쯤이야
꽃이 제일 슬플 땐 피지 못할 때라며
부드러운 가을바람처럼 무심으로 꽉 품어주면 그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변하듯 인격도 변한다
개념 없는 시가 개념 있는 시보다 더 잘 먹히고
짧은 시가 긴 시보다 더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네들의 자유
오답 속에 무참히 익사하는 게 어디 시뿐이던가
양치기 소년은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고 더 얄팍한 자들은
미리 봐둔 서정적 비상구를 통과해 제집에서 편안히 히트작들을 써대고 있잖은가
지겹도록 순수를 양심을 본분을 지켜도
내 인생의 안뜰에 쌓이는 건 타인의 쓰레기들
다른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게 훨씬 험난한 세상이다
어딜 가도 포식자들은 에너지 넘치는 순한 이들의 문고리를 끊임없이 탐하고
백 년이 지나고 천년이 흘러도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자들은
눈동자 없는 슬픈 눈으로 우리를 빤히 쳐다볼 것이다
그러니 누가 내 팔목을 쓰윽 그어 주렴
아직도 내 피가 붉은지 보고 싶다
그 붉은 피로 어제는 짧은 시를 쓰고
오늘은 긴 시를 쓰고
내일은 또 어떤 시를 쓸지 알 수 없지만
누가 뭐래도 내 소원은
‘얼마나 멋진 날인가’로 시작하는 시를 써보는 것
그리고 그 시를 들여다보기 위해 온몸을 숙이고
그 속으로 황홀하게 빨려 들어가는 것
순식간에, 아주 천천히
—계간 《예술가》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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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1957년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잡히지 않는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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