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소파(외 1편) / 송재학

문근영 2016. 4. 28. 06:23

소파(외 1편)

 

   송재학

 

 

 

철교 아래 가죽 소파이다

돌아갈 집이 있는 듯 반짝 얼굴 단장으로 며칠 반질거렸다

고양이 낮잠에 기대어 하품까지 하더니

결국 궁티로

소파는 쓰러지면서 네 발을 허공에 올렸다

발가락이 먼저 문드러지기에

가을 땡볕의 생활이거니 짐작한다

바다거북처럼 괴로운 자세만 있었던 건 아니다

우스꽝스런 물구나무 서기로

오지의 터진 실밥자욱이 다 보였다

몇 발자국 더 가면 강물이지만

거북 걸음으로 평생이 걸리겠구나

자해가 아니라지만

민망한 스프링이며 스폰지가 꾸역꾸역 밀려나온다

 

소파의 행려 주위로 풀이 무성해지면서

비만도 부끄러움도 초록은 동색인 양 묻혔다

작은 풀들이 조잘거리는 동안

개망초의 키는 신통하게 소파와 비슷해졌다

소파는 난생 처음 막대사탕을 빨고 있다

코스모스의 꽃배달을 받았다

꺼림칙한 외래종인 자리공이 마을 오기도 했다

다시 뚱뚱해진 소파의 등짝이

꽃들과 어깨동무할 만큼 얼추 편안해졌을 때

 

가을의 인부들이 부산하게 소파를 트럭에 싣고 떠났다

관절 하나를 버려두고 갔다

 

 

 

                —《애지》2012년 겨울호

 

 

 

  검은 창고

 

 

 

   들판의 창고는 대체로 회색이다 녹색 창고만 해도 들판과 어울리지 않는 색조 때문에 적재가 쉽지 않다 회색 창고라면 무엇이던 쌓아두기에 편하겠지만 내가 본 것은 검은 창고, 고산족의 다랑이논 옆에 있다 반추동물처럼 느리게 엎드렸는데 귀가 없다 먹거리만 쟁여놓은 창고가 아니다 높이와 깊이가 필요한 고산협곡에서 바람을 선택한 검은색이니까 바람은 쉬이 몸의 기별과 겹친다 내가 원했던 검은색이다 야크의 털이 검은 게 아니라 그 시선이 어둡다 이목구비가 없는 것들에게 검고 깜깜하거나 거무죽죽하며 거무스름하면서 꺼뭇꺼뭇한 얼룩은 때로 몸이고 생각이다 또한 검은색은 위로의 손바닥이 만지는 시간의 늙은 표면이다 산을 넘어야 하는 우편낭도 검은색이지만, 유서를 남기는 편지지의 감정마저 검은색이다 밤의 결혼식을 보았다면 산과 저녁의 어름에 검은색 청혼을 먼저 지나왔겠다 입을 한껏 벌린 검은 짐승의 하품까지 모두 검은 창고에 보관된 오래된 말이다

 

 

 

                      —《현대시》2013년 2월호

-------------

송재학 /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기억들』『진흙 얼굴』『내간체를 얻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