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계단 / 정영효

문근영 2016. 4. 25. 06:45

계단

 

   정영효

 

 

 

어쩐지 명분이 부족하다

처음에 언덕이 있었을 테고 누군가

언덕의 꼭대기에서 닿지 못하는 형상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리를 바치는 제단이나 위인을 받드는 단상을 쌓았다면

거기로 통하는 계단은 무릎이 복종하는 입구였던 셈

 

말하자면 믿어서 멀어지는 위치를 부르기 위해

자신이라는 가장 좁은 근방을 갖겠다는 약속이

오래된 신전과 솟아오른 무덤 앞, 계단을 들어설 때 하는 인사였겠지만

 

왜 이곳은 겹겹이 덧댄 천장들로 가득한가

또 그 밑을 떠도는 발자국들은 왜 문 뒤에만 숨어버리는가

 

지붕 하나 지고 살다 무한을 바라던 자들에겐

해발을 풀어주는 계단이 지상의 간섭을 버릴 수 있는 막다른 자리

그러나 비밀도 맹세도 없이

나는 층층을 밟을수록 공중에 생긴 면적을 섬기면서

마지막 계단까지 이른 적은 드물다

통로가 빨려든 열쇠 구멍 너머

이름 모를 걸음을 듣고 종일 쥔 실마리를 놓친 채 자주 누웠으니

어떤 소문이 나를 두드리고 갈 것인가

비탈을 거닐다 주인을 잃은 헛것들

 

전구의 미색이 그림자를 거드는

계단 중간쯤에 두고 온 눈빛이 찬 기색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딩아돌하》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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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효 / 1979년 경남 남해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2009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출처 : 작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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