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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과를 그리다 (외 1편) / 박승미

문근영 2016. 4. 25. 06:45

사과를 그리다 (외 1편)

 

   박승미

 

 

 

사과를 그리다가

사과의 무게도 같이 그리다

 

사과를 반 쪼개 놓고

사과의 씨를 중심으로 둥글게 그리다 보면

사과가 활짝 웃는 얼굴이,

다 그린

사과의 명암을 그리지 않는 것은

사과는 이미 내게로 와 나의 무게가

 

사과의 당도는

사과의 무게보다 무겁다

사과의 빨간색은

사과의 자비다

 

사과를 그리고 싶을 땐

사과의 자비가 그리운 때다.

 

 

 

바다를 품다

 

 

 

자산어보를 읽다가

오징어의 먹물로 썼다는 글씨가 의심스러워져

 

싱싱한 갑오징어 먹물을 붓에 찍어

화선지에 댓잎을 그려 보았다

먹물이 화선지를 만나자 황송하게도

금빛으로 찬란하더니

물기가 마르면서 황금빛은 걷히고 갈색이 완연한데

말 그대로 자연색이라

댓잎이 갈대숲 사이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듯

그만 바람에 색이 날아갈까

두르르 화선지를 말아 놓았다

 

님기다림에눈물이마를날없던한여인이있으니

인편에받은님의편지온통하얀여백만있더라

그리움이북받쳐서편지위에얼굴묻고섧게울다

보니눈물로젖은편지가구구절절사랑이라하니

 

화선지를 펴 보았다

바람인 듯 그리움인 듯

흑산도 그 먼 섬이

내 안에서 출렁이는 자산어보,

바다를 품은 책을 그만 덮는다.

 

 

 

                           —시집『그림과 놀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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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미 / 경기도 용인 출생. 세종대 국문과 졸업. 198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땅위에 닿지 않는 기쁨』『너는 모과다』『완전한 포옹』『마음 심心』『그림과 놀다』등.

mogoa33@daum.net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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