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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봇대 뒤의 세계 (외 1편) / 이장욱

문근영 2016. 4. 20. 09:17

전봇대 뒤의 세계 (외 1편)

 

   이장욱

 

 

 

호기심의 끝에 있는 것.

킁킁거리는 코와

전봇대의 깊이 너머에.

 

거기서 자꾸 달아나는 중인 것.

냄새가 없는

내일이 없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과 흡사한.

 

우리는 오래전에 술래잡기를 한 적이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보인다.

머리카락,

 

점점 무성해지는 그림자들의 자리에

밤의 전봇대 뒤에

누가 계속 숨어 있다.

개의 목줄을 쥔 채

개에게서 숨으려는 사람처럼.

점점 커지는 머리통을 감추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저녁 무렵에 가만히 내어다본다.

숨어 있는 사람이 아직도 숨어 있는

적막한 골목을.

거대한 머리통이 아직도 자라고 있는

밤의 전봇대 쪽을.

의혹에 가득 찬 눈으로.

 

 

 

                         —《시인수첩》2013년 봄호

 

 

   밤의 독서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나는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나는 어지러운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도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POSITION》 20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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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정오의 희망곡』『생년월일』.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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