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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 (외 1편) / 최승호

문근영 2016. 4. 5. 08:29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 (외 1편)

 

             최승호

 

 

 

      아프리카 코뿔소도 인도 코뿔소도

      코뿔이 뽑히면서 너무 많이 죽었다

      내가 코뿔소 대변인은 아니지만

      뿔에 눈이 멀어

      사람들이 코뿔소를 너무 많이 죽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달려도 허공이고 뒤로 달려도 허공이고 위를 봐도 허공이고 아래를 봐도 허공인 큰 허공에서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는 어디로 달려야 할까 무한이 뭔지 무변이 뭔지 무극이 뭔지 일자무식인 코뿔소는 달리고 달려도 밟는 자리마다 허공이어서 잠시도 서 있을 수가 없는데 슬픔의 무게가 4톤쯤 되는 코뿔소를 데리고 허공 밖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무소뿔도장으로 판결문에 시뻘건 도장을 찍던 분이 누구였던가

 

      황혼의 피 마른 서류들이여

      무소뿔부채로 얼굴을 가린 신선들이여

      코뿔이 없어도 코뿔소는 허공을 들이받으며 달릴 것이다

      들이받다 보면 큰 허공이 우르르르 다 무너지지 않으랴!

 

 

 

    러닝머신 위의 남자

 

 

 

      헬스장에 나타난 그 남자는 악어처럼 엎드려

      이를 악물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

      악어는 팔굽혀펴기를 하지 않는다.

      이를 악물지도 않는다.

      달려가서 그냥 이빨로 콱 물어뜯지!

      그 남자는 그 여자와 헤어진 뒤로

      어느 날 핼쑥해진 얼굴로 헬스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벌써 삼십분이나 달리고 있다. 뛰어도 뛰어도 제자리인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그는 왜 뛰는 걸까. 물렁한 의지력을 강철로 만들기 위해, 복근에 王 자를 만들기 위해, 아니면 세계마라톤대회에 나가기 위해,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는 제자리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실연의 우후죽순들이 자라서

      슬픔의 왕대나무숲을 이루고

      그것이 가슴 한 구석에서 서걱거릴 때

      바람이 불고 어느덧 옛 애인이

      인자한 할머니가 되어 나타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러닝머신 위의 남자가 이번에는

      요가를 하느라

      외발로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다

 

 

 

                      —《현대시학》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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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 1954년 춘천 출생.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진흙소를 타고』『세속도시의 즐거움』『회저의 밤』『반딧불 보호구역』『눈사람』『여백』『모래인간』『그로테스크』『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고비』『북극 얼굴이 녹을 때』. 현재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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