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유병록
아무래도 나는 빨강이 되어 가는 중이다
빨강을 만난 건 겨울이었거나 겨울이 아니었더라도, 그는 흰 눈 위에 떨어진 핏방울 혹은 얼음 속의 불……
우리 잠시 스쳤을 뿐인데
묻었나 봐
꼭 여며 두었던 소매 끝이거나 긴 목도리의 한쪽에
열꽃이 번지고
나는
사흘에 한 번 빨강을 앓고 하루에 한 번 그를 앓으며…… 빨강이 되어 간다
빨강은 얼어붙은 불이었거나 불타는 얼음
이미
날은 어두워졌는데 얼음에는 관용의 기미가 없는데
몇 켤레의 빨강 발자국이 지나간다 구름 위 어느 따뜻한 나라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사과처럼 몇 개의 붉은 지붕이 빛난다
빨강은 죽어 간다는 증거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다는 증거
色에 빠지면 흑백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데
나는 붉어진다
홍조를 띤 것처럼 빨강이 되어 간다 불타오를수록
추운
—《시작》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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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2010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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