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피 / 심보선

문근영 2016. 4. 5. 08:29

 

   심보선

 

 

 

오늘날 피를 제외하고는 따스함이 없다

피를 제외하고는 붉음도 없다

피가 그저 의미 없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마지막 절규가 터지기 전까지

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장미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예전에 우리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여전히 같은 가사와 같은 선율의 노래

그러나 이제 그 노래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노래를 가장 잘 불렀던 이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래를 멈추지 마라

 

지금까지는 손이 나와 동행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나를 이끌고

다리 난간에서 나를 버텨주었던 손

나는 손을 신뢰했다

사랑하는 이의 볼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입에 밥을 떠먹였기에

무엇보다 내 몸이 가장 자주 피를 흘렸기에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노래를 멈추지 마라

갓 지은 밥에서 피 냄새가 나는지 맡아봐라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태양이 아닌 것

그러나 태양이라고 믿는 것

그쪽을 향해 걸어가라

 

마음의 번민이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

이를테면 일어서는 것과 쓰러지는 것이 뒤섞인

장미, 노래, 밥, 피 묻은 너의 손, 나의 태양……

 

삶은 피의 무게로 저울질될 것이다

계속해서 걸어가라

번민하며

번민을 버리며

 

 

 

                       —《창작과 비평》2013년 봄호

-------------

심보선 / 1970년 서울 출생. 1994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