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심보선
오늘날 피를 제외하고는 따스함이 없다
피를 제외하고는 붉음도 없다
피가 그저 의미 없는 물이라고 말하지 마라
마지막 절규가 터지기 전까지
피는 이 세계의 유일한 장미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예전에 우리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여전히 같은 가사와 같은 선율의 노래
그러나 이제 그 노래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노래를 가장 잘 불렀던 이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나 노래를 멈추지 마라
지금까지는 손이 나와 동행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나를 이끌고
다리 난간에서 나를 버텨주었던 손
나는 손을 신뢰했다
사랑하는 이의 볼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입에 밥을 떠먹였기에
무엇보다 내 몸이 가장 자주 피를 흘렸기에
장미를 손에서 놓지 마라
노래를 멈추지 마라
갓 지은 밥에서 피 냄새가 나는지 맡아봐라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태양이 아닌 것
그러나 태양이라고 믿는 것
그쪽을 향해 걸어가라
마음의 번민이란 서로 반대인 것들이 뒤섞인 핏물
이를테면 일어서는 것과 쓰러지는 것이 뒤섞인
장미, 노래, 밥, 피 묻은 너의 손, 나의 태양……
삶은 피의 무게로 저울질될 것이다
계속해서 걸어가라
번민하며
번민을 버리며
—《창작과 비평》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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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 1970년 서울 출생. 1994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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