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쇄빙선 / 채호기

문근영 2016. 4. 5. 08:29

쇄빙선

—얼음 4

 

   채호기

 

 

 

쇄빙선이 얼음을 깨뜨리며 나아간다.

그 뒤로 길고 긴 문장들이 생겨난다.

펜촉이 침묵을 깨뜨리며 나아간다.

 

문장은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는 탈출로다.

백지의 바다 위에 채 녹지 않은 언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물결에 절반 넘어 잠긴 채.

 

바다 위 얼음 덩어리는 묵직한 뱃머리가

눌러도 침몰하지 않고 다시 떠오른다.

목구멍으로 눌러도 눌러도 가라앉지 않고

혀 위를 맴도는 말은 얼음이다.

거대한 유빙이 몸 속을 떠다닌다.

 

얼음은 침묵이다.

침묵은 입 다문 영혼,

영혼의 손가락에 몸을 끼운 채

몸은 얼어붙은 미지를 깨뜨리며 나아간다.

 

파도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낙차가 생산하는 물보라.

조각난 시간은 언어가 되어 둥둥 떠다닌다.

 

물결에 절반 넘어 잠긴 채

언어는 끝내 녹지 않는다.

얼음 속에서 침묵이 반짝인다.

 

 

 

                       —《시인세계》2013년 여름호

-------------

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 뜨겁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