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빙선
—얼음 4
채호기
쇄빙선이 얼음을 깨뜨리며 나아간다.
그 뒤로 길고 긴 문장들이 생겨난다.
펜촉이 침묵을 깨뜨리며 나아간다.
문장은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는 탈출로다.
백지의 바다 위에 채 녹지 않은 언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물결에 절반 넘어 잠긴 채.
바다 위 얼음 덩어리는 묵직한 뱃머리가
눌러도 침몰하지 않고 다시 떠오른다.
목구멍으로 눌러도 눌러도 가라앉지 않고
혀 위를 맴도는 말은 얼음이다.
거대한 유빙이 몸 속을 떠다닌다.
얼음은 침묵이다.
침묵은 입 다문 영혼,
영혼의 손가락에 몸을 끼운 채
몸은 얼어붙은 미지를 깨뜨리며 나아간다.
파도의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낙차가 생산하는 물보라.
조각난 시간은 언어가 되어 둥둥 떠다닌다.
물결에 절반 넘어 잠긴 채
언어는 끝내 녹지 않는다.
얼음 속에서 침묵이 반짝인다.
—《시인세계》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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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지독한 사랑』『슬픈 게이』『밤의 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 뜨겁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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