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김정환

문근영 2016. 4. 4. 09:21

독수리 (외 3편)

 

   김정환

 

 

 

잘난 사람들은 모른다.

내 날개가 바로 어깻죽지의

운명이라는 것을.

날아오르는 날개는 없다.

내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

떠받침이 있을 뿐.

숭배보다 더한

그 무엇이 있을 뿐.

지상의

짐승의 시체를 파먹으며

내 날개가 느끼는 것은

유가족 집단의, 집단적인

위의(威儀).

산 귀 속 슬픈 노래

죽은 귀 속으로

살아남는 선율의.

그 사이 벽의.

그 벽인 나의.

꿈 언저리 머나먼

가족의 악몽의,

내가 산 개구리를 한 입에 잡아먹지 않는 것은

털도 없이 뙤약볕을 받는

그의 점액질

면적이 죄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의 면적은 그의 세계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간이

순서를 닮지 않는다. 오히려 내력의

그림이 공간을 닮는다.

현재는 시간의 질서지만

내 공포에 비린내가 없다.

날개로 하여

내 몸은 부사다.

삶이 삶이기 위하여 때로는

죽음의 껍질이 되고

죽음이 죽음이기 위하여 때로는

가장 떨리는 그

X-레이를

나는 안다. 비로소 퉁퉁 부은

발이 보일 때

때로는 비로소

발이 퉁퉁 부어 보일 때

나는 가위눌리는 식사

준비를 한다.

잘난 사람들은 원두커피나 끓일 때

내 식사에는 아무리 모여도 범죄의

구성이 없다.

잘난 사람들은 그것을 악기라 부른다.

 

 

 

서시

 

 

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 아니라

이제는 목전의 전율의

획일적 이빨 아니라

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

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

너는 네가 아니라

내 고막에 묻은 작년 매미 울음의

전면적, 거울 아니라

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

음악의 몸일 때

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너는 나의

연주다.

 

민주주의여.

 

 

 

 

 

가는 비는 세상을

씻어내리지 않고 세상을

적시지 않고, 가는 비는 세상의

귀지,

제 몸에 귀를 기울이는

귀지,

가는 실잠자리 가는

장구채 위에 내리는

가는 비는

귀지.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1. 모기, 내가 간섭

 

너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체위를

무슨 결심하듯

경배하듯 허공에 단 한번

손뼉 짝 박수를 치고

속도와 방향의 운이 좋은 그사이 나는 죽는다.

눈 깜짝할 사이고, 합장이다. 운이 나쁘면 내가 긴 다리를

더 쭉쭉 뻗으며 죽음의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착하다면 네가 연민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건 ‘뒤늦은’보다 ‘하마터면’에 더 가까울 것.

그렇지 않더라도 내 다리의 기나긴 경련은

너나 나나 속수무책일 것이다.

바퀴벌레 같은 소리.

네 말마따나 목숨은 기계와 같다. 다만

거기까지만 너의 말,

나의 정신을 보지 못한 네가 정신을 잃는 나의

순간을 보았을 리 없다. 그 순간

너의 시간은 흘러간다. 위태하다. 째깍째깍 나의 육신을 찢어발기는

의성과 의태 모두.

나의 시간은 명멸한다. 그 명멸 속으로 나도 명멸한다. 명멸이

원래 나의 삶이기도 하였다는 생각. 정신을 잃으며

시간은 누구에게

빛인가.

너는 이상한 장소 이상한 시간이다.

너의 계단은 불안하지만 불안은 나의 계단이다.

 

2. 거미, 그렇다면 나도 간섭

 

기억은 호시탐탐 육체의 지위를 노린다.

육체보다 더 똘똘 뭉치고

내 생각에 여기서 죽음이 삶과 갈라진다.

너무 똘똘 뭉쳐 확연한 기억의 바깥과 접근

불가능한 기억의 핵심이

모두 죽음이라는 거지.

그러느니 나는 파경의 좌우도 포함해서

기억의 실타래 풀어

집을 짓겠다는 거지. 신경망보다는

살림 가재도구 배열에 더 가깝게. 그리고

시간을 끝없이 줄이는 망원경(광년, 별빛은 언제

어디서 오고 우리는 어디로 어느 만큼)으로

그것을 곰곰 들여다보는

것과 일이 죽음이라고 한번 해보자는 거지.

아무래도 집은 불가사의할 수 없다.

과학도 배꼽이거니 할밖에 없다.

바람은 이따금씩 불어

내 집 내 줄 내 몸을 스친다. 그건 나의 연주다.

나를 연주하는 것 아니라

내가 연주하는 나의 연주다.

우주 같은 소리.

 

(이하 생략)

 

 

 

                      —시집『거푸집 연주』(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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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1980년《창작과비평》에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황색예수전』『회복기』『좋은 꽃』『해방서시』『우리, 노동자』『기차에 대하여』『사랑, 파티』『희망의 나이』『하나의 2인무와 세 개의 1인무』『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텅 빈 극장』『김정환 시집 1980~1999』『해가 뜨다』『하노이-서울 시편』『레닌의 노래』『거룩한 줄넘기』『유년의 시놉시스』『거푸집 연주』등.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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