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당신 (외 1편) / 함기석

문근영 2016. 3. 28. 04:57

당신 (외 1편)

 

      함기석

 

 

 

   잘못 펼치셨습니다 그냥 넘기세요 당신은 잘못된 페이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사건현장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사체가 흰 천에 덮여 있는 골목입니다 당신은 접근금지구역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라는 무한히 갈라지는 무한골목 내부에 있습니다

 

   북쪽으로 검은 모자와 시계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남쪽에선 이빨이 썩은 코스모스들이 악취를 풍기며 웃고 있습니다 서쪽에선 죽은 고양이들의 교미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동쪽에서 아기 울음소릴 내며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해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당신은 빨간 노끈으로 차단된 살인현장입니다 당신이 흘리는 피와 시간이 흰 천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침묵하는 미궁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목격하며 당신에 갇힙니다 당신 사체 옆의 당신 사체 옆의 당신 사체 옆의 무한 사체들

 

   잘못 펼치셨습니다 당신은 썩어가는 페이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악취로 파리와 쥐 떼를 부르는 기이한 골목입니다 당신은 음모와 발톱이 자라는 사건현장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접근금지구역입니다 당신은 무한히 갈라지는 무한 개의 폐곡선입니다 찢어버리세요

 

 

 

                     —《현대시학》2013년 5월호

 

 

불가능한 서랍

 

 

 

내가 그녀와 키스할 때

좌표 (2, 4)는 금붕어 두 마리가 헤엄치는 봄밤의 연못

빈 서랍에서 빈 고양이 비가 나온다

누구도 볼 수 없는

백지 복면을 뒤집어쓴 자객의 발걸음으로

 

칼집에서 흑장미를 뽑아들고

비가 온다

비의 다리엔 흰 독버섯들이 숭숭 돋아나 있고

밤은 등뼈가 점점 활처럼 휘고 있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질 때

좌표 (1, 1)는 쌍둥이 금붕어가 파닥파닥 뛰노는 수중놀이터

창백한 대기엔 눈동자를 키우는 어항들

풍선처럼 떠가고

비 울음이 퍼진다 마지막 가지가 꺾인 벚꽃나무처럼

 

손가락 끝, 잠이 아픈 여자

그 고통의 마디와 목덜미를 핥는 내 거친 입술

원점 (0, 0)엔 죽음보다 깊고 둥근 알들

고양이일 수밖에 없는 고양이들이 폭발하며 태어난다

 

내 혀가 그녀의 혀와 엉킬 때

좌표 (-1, 1)는 죽은 금붕어도 파닥파닥 헤엄치는 공중놀이터

비가 될 수 없는 비의 울음이 폭우가 되어

어둠 속으로 퍼진다

이차포물선을 따라 음의 방향으로 날아가는 4월의 빗소리

 

사람의 밀어는 핏물이 다 빠져나간 짐승의 혈관이다

이제 우리가

흐르면서 함께 울어야 할 차례

좌표 (-3, 9)에서 불가능한 서랍들이 열리고

 

비가 될 수 없는 비가 쏟아진다

발도 털도 가죽도 눈동자도 없는 말과 짐승들이 쿵쿵

거대한 수레바퀴 형상으로

이빨들을 쏟아내며, 불가능한 서랍 속에서

 

 

 

                       —《현대시》201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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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오렌지 기하학』『뽈랑공원』『착란의 돌』『국어선생은 달팽이』, 동시집 『숫자벌레』, 동화집 『상상력학교』『코도둑 비밀탐정대』『야호 수학이 좋아졌다』『황금비 수학동화』 등.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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