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관문성(關門城)

문근영 2015. 12. 23. 03:31

관문성(關門城)



일부 복원된 성벽







일부 복원된 성벽


일부 복원된 성벽



일부 복원된 성벽







일부 복원된 성벽


지정 번호; 사적 48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산업로 1739-6(모화리 산122), 울산광역시 북구 달천동중산동천곡동 및 울주군 범서면 일원

지정일; 1963121

시대; 통일신라 성덕왕 21(772)

분류; 성지[성곽]

내용; 관문성은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와 울산광역시 북구 중산동천곡동달천동 및 울주군 범서읍 일원에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 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772(통일신라 성덕왕 21) 10월에 모벌군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곳이 신라의 모화군(毛火郡)이었으므로 바로 이때가 관문성을 축조한 연대이다. 한편 9세기 초에는 문화관문(蚊火關門)으로도 기록되었고,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각간(角干; 신라 때의 최고 관위로 1/17관등) 원진(元眞)3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6,7925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은 663(신라 문무왕 3)에 축조된 부산성(사적 25)673(문무왕 13)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경주 평야의 동쪽, 즉 경주에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영일만(迎日灣)과 울산만(蔚山)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정 면적은 892,014[27307]에 달한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경주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의 삼태봉(三台峰)의 남측에 있는 둘레 1.8의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서쪽으로 모화리와 녹동리의 문을 거쳐 서쪽의 치술령(隧述嶺) 남쪽에 걸쳐 있으며, 석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우박천(牛朴川)을 사이에 두고 양편 높은 산에 동해를 향해서 쌓았는데 이것은 동해 쪽에서 침입해 오는 왜병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만에 상륙한 왜병들을 이곳 관문성에서 굳게 지켜 월성까지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전초적인 구실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에 기박산성에서 10개의 명문 각석이 발견되어 축성의 방법이 남산성(사적 22)과 같이 일정한 간격으로 분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 안에는 문 터 5개소와 수구 3개소, 건물 터 5개소 및 우물과 연못이 각각 1개씩이 남아 있다.

특기 사항;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남산성과 비교해 볼 때 성 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박제상과 망부석); 망부석(望夫石)은 치술령에 있다. 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쳤던 박제상(朴提上) 혹은 김제상(金提上)의 부인이 돌이 된 채 신모(神母)가 되었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망부석의 설화는 선도산(仙桃山) 성모의 설화와 함께 여인을 신격화시킨 특이한 신라 전설의 유형을 보이고 있다. 17대 내물왕(奈勿王; 재위 356~402)이 왕위에 오르자 일본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양국 간의 화평을 제의하였다. 그 화평의 징표로서 한 분의 왕자를 왜국에 보내었다. 그러나 왜국은 신라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억류하고 30년이나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편 신라에서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이 즉위한 지 3년에 고구려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었다. “우리 임금께서 대왕[눌지왕]의 아우 복호(卜好)라는 분이 슬기롭다함을 듣고 서로 가까워지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왕은 다행히 여겨 복호를 보냈으나 역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도 왕자를 억류한 채 돌려보내지 않았다. 눌지왕은 즉위 10년에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협(豪狹)들을 불러 모으고 친히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세 순배 돌아갔을 무렵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내가 두 아우를 적지에 볼모로 보내고 잠시라도 이들의 안부를 걱정치 않은 날이 없고. 만약 내 두 동생을 만나보고 함께 선왕의 사당에 고하게 된다면 나라 사람에게 보은함이 아니겠소?” 아무도 꾀를 내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박제상이 말하였다. “신이 듣자니 임금께 우환이 있은 즉 신하된 자는 이를 욕되이 여기고, 임금께 욕되심이 있을 때 신하된 자는 죽음으로써 이를 갚는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이 어렵다 쉽다 따지고 나서 행한다면 이것은 충성치 못한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이것은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대명을 받들겠나이다.” 곧 제상은 고구려로 들어갔다. 복호의 처소에 가서 함께 도망할 때를 약속하고 고성(高城)의 수구(水口)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밤이 되자 둘은 고성 바다에 배를 띄웠다. 고구려왕이 이 사실을 알고 군사를 풀어 뒤쫓았다. 그러나 복호가 고구려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왔기 때문에 군사들은 왕자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 복호는 무사히 귀국하였다. 왕은 복호를 보자, 새삼 왜국에 억류된 미사흔 생각이 간절하여 한편 기뻐하며 한편 슬퍼하였다. 제상은 이를 보고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일본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는 왜국에 가서 거짓 고하였다. “계림왕(鷄林王; 신라왕)이 죄도 없이 제 부형을 죽인 까닭에 여기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왜왕은 그 말을 믿고 집을 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다. 어느 날 새벽안개가 짙게 끼자, 제상은 이때라고 생각해서 미사흔을 바다로 보냈다. 자신은 미사흔의 옷을 갈아입고,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였다. 저녁이 지나자 왜인들이 수상히 여기고 들어와 보니 그는 왕자가 아니라 제상이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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