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문근영 2015. 12. 15. 03:01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보호석과 전경


전경


전경


전면




호석 세부


좌측의 문, 무인상 및 석물


지정 번호; 사적 26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지정일; 1963121

시대; 통일신라 소성왕 원년(798)

분류;

내용; 경주 원성왕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의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38대 임금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괘릉(掛陵)이라고 부른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원성왕으로 보고 있다. 원성왕은 본명이 경신(敬信)이고, 내물왕(奈勿王)20세손이며, 어머니는 박씨 계오 부인(繼烏夫人)이다. 재위 기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981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원성왕릉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한다고 전하는데 지금 원성왕릉 인근에 숭복사지가 있어 원성왕릉괘릉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비록 능묘 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세부 수법은 신라인의 독자적인 것으로 통일신라의 가장 완비된 능묘 제도를 보여주고 있다. 지정 면적은 75,372[22,840]에 이른다.

  원성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밑의 호석(護石; 둘레돌)은 지대석(地臺石; 바닥돌) 위에 높이 95, 길이 120크기의 판석으로 된 면석(面石)을 올렸다.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있는 탱석(撑石)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전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12지신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 수법은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12지신상의 조각품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호석이 밖으로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回廊)으로 조성하고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m의 네모진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석주는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석주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되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이 놓였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석사자 두 쌍, 문인석 한 쌍, 무인석 한 쌍과 석주(石柱) 한 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또한 현재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 857~?)이 비문을 쓴 석비가 있었다 한다. 석사자는 각각 자세와 표정이 달라 능숙한 석조 기술을 보여주고 있고, 감정 표현이 매우 풍부하고 세련되었다. 문인석은 각선이 분명하고, 관복이나 근엄한 안면 처리가 매우 우수하다. 무인석은 의복이나 안면의 모습이 신라인이 아니다.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Persia) 무인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기 사항; 석조물들의 조각 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 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 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호석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 지는 뛰어난 조각 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야기 1;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으로 원래 이찬(伊湌; 2/17관등) 김주원(金周元) 밑에서 각간(角干; 1/17관등) 벼슬을 하였다. 하루는 김경신의 잠을 자다가 머리에 쓴 두건을 흰 갓을 쓰고 손에는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꿨다. 꿈이 이상해서 점을 쳤더니,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이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입니다. 또 우물에 들어간 것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고 풀이를 했다. 경신은 걱정이 되어서 그때부터 문 밖 출입을 삼갔다. 이즈음 아찬(阿湌; 6/17관등) 여삼(餘三)이 찾아왔다. 경신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여삼은 다시, 꼭 한 번 만나야 한다고 간곡히 청해 왔다. 경신도 더 거절할 수 없어 들어오게 하였다. 여삼은 무슨 걱정이 있어서 두문불출이냐고 물었다. 경신은 꿈꾼 일과 해몽 점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런데 여삼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하고는 말했다. “이 꿈은 정말 좋은 꿈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해몽을 하겠습니다.” 경신은 옆에 있던 자들을 물리치고 단 둘만 남게 되자 여삼에게 그 꿈이 어떤 꿈이냐고 물었다. “두건을 벗는 것은 위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며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그리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대궐에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한마디로 그 꿈은 왕이 될 꿈이옵니다.” 경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놀라워서 다시 물었다. “내 주위에는 이찬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겠소?” 여삼은 비밀리에 북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일러주었다. 경신은 그 말대로 했다. 얼마 안 지나 선덕왕이 죽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때 김주원의 집은 북천 개천 너머에 있었는데 갑자기 개천의 물이 불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는 틈에 김경신은 얼른 대궐로 들어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주언을 추대했던 중신들도 태도를 바꿔 새 임금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김경신이 왕이 되니 바로 신라 38대 원성왕이다.


이야기 2(전 원성왕릉의 정체); 괘릉이 역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1669(현종 10)에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가 최초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괘릉은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근세인 구한말 어느 때인가부터 신라 31문무왕릉(사적 158)이라고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경잡기에 나오는 수장이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 같다. 1906년에는 일제 황국사관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 龍], 1916년에는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괘릉을 찾았는데 이미 그 곳에는 문무왕릉이라는 팻말이 있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일 합방 이전부터 문무왕릉으로 알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의 풍수를 쓴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조선의 미술사를 쓴 세키노 다다스[關野貞]가 이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저서에 괘릉문무왕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니시 류는 1906년에 이미 원성왕릉일 것이라는 추론을 내린바 있다. 즉 당시 이마니시 류는 1939년에는 확인된 숭복사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관계로 해서 신라의 곡사, 고려의 숭복사가 괘릉 부근에 있다고 한다면 괘릉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추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괘릉문무왕릉 설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1970년대 이후에야 원성왕릉으로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 이전 1967년도 517일에 감은사지(사적 31) 동쪽 해중 200m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릉이라는 사실이 삼산 오악 조사단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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