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문근영 2015. 10. 6. 00:24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지정 번호; 국보 199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길 175-143(송선리 산89) 단석산 신선사

지정일; 1979522

시대; 신라 후기

분류; 마애불

내용;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은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의 단석산 중턱에 이르면 높이 30m의 거대한 암벽이 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 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곳은 김유신(金庾信; 595~673) 장군과 관계가 있는 화랑(花郞)의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은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 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여래 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로는 2단으로 된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돌기한 살의 혹)가 작게 솟아있다.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동쪽 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쥐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쪽 면에도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서 앞의 두 불상과 함께 3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慶州上人巖造像銘記(경주 상인암 조상명기)’라는 400여 자의 글이 음각(陰刻; 뚫을새김) 되어 있는데 신선사에 미륵 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북쪽 바위 면에는 모두 7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부터 여래 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 입상, 여래 입상,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반가상은 고신라시대의 마애상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다. 반가 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아래쪽에는 버선 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한 공양상 2구와 스님 한 분이 새겨졌는데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기 사항;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시원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야기 1(단석산과 소년 김유신); 단석산은 경주 왕성에서 30여 리 안팎 떨어진 서북쪽에 위치해 있고, 건천읍에서는 오봉산 다음에 연이어 경주 쪽으로 서남쪽에 위치한 높이 827m에 이르는 산이다. 앞쪽 산기슭은 조전, 방내, 모량리에 이어져 있고, 남쪽은 화천(花川) 뒷들에 이어져 있다. 신라 때에는 이 산을 중악(中岳)이라 부른다 하였고,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보면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산이 단석산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해서 유명하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험하고 깊은 산 속에 찾아온 한 소년이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늠름한 용모와 초롱초롱한 눈빛, 꽉 다문 입술, 첫눈에 누가 봐도 예사로운 소년 같아 보이지는 아니 하였다. 소년은 산 정상 가까운 곳에 있는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에 목욕재계하고 올라가 가장 큰 바위 밑에 앉아 향을 피우고 단정하게 꿇어앉아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적국들은 날로 무도하게 이 나라를 침범하여 언제나 편안한 날이 없습니다. 이 몸은 미천한 존재로서 재주도 용력도 없사오나 장차 이 환란을 없애고, 삼한을 통일하게 하는 간절한 힘을 저에게 주옵소서.” 해가 저물고 날이 밝아도 쉬지 않고 계속 한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눈을 감고 며칠이고 기도만 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밤낮 기도하기를 나흘째 되는 날, 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것처럼 한 노인이 소년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갈색의 옷을 몸에 걸치고, 흰 수염을 가슴까지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흡사 신선과 같기도 하고 도사처럼 위엄도 있었다. 소년은 눈을 번쩍 뜨고 놀라서 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어 소년을 향해 물었다. “여기는 깊은 산 속이며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인데 두렵고 무서운 생각 없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소년은 노인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정신을 빼앗긴 채 노인의 얼굴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신 뉘시며 존명은 어찌되시는지 알고자 하옵니다.” 소년의 당돌한 이 물음에 노인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으면서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고, 인연에 따라 바람처럼 오고 가는 사람인데 이름은 난승(難勝)이라고 하지.”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예사 노인이 아님을 직감하고는 자신의 신분을 공손하게 아뢰었다. “저의 이름은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를 늘 괴롭히는 적국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큰 포부로 기도를 드리고 있사옵니다. 장차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데 어른께서는 예사로운 분이 아니심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저에게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노인은 소년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이 노인이 더욱 예사로운 어른이 아님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간청을 되풀이하였다. 이 간청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여섯, 일곱 차례까지 매달리듯 하였다. 그러자 비로소 노인은 못 이긴 듯 입을 열었다. “너는 어린 소년의 몸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니 참으로 놀랍고, 그 기개가 가상하구나. 너의 뜻이 기특하고 정성이 갸륵하므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겠다.” 소년 김유신은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수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고마워하였다. 열흘, 보름, 스무날 소년은 노력을 다한 까닭에 놀라운 속도로 무예의 비법을 터득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가르침을 다 했을 때 노인 난승은 소년을 불러 앉혀 놓고, 조용히 당부를 하였다. “너에게 내가 가르친 이 비법은 삼가 써야 하며 망령되게 남에게 함부로 누구에게 전해도 안 되고, 또 옳다고 하는 일에만 반드시 써야지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해를 당할 것이니 이것을 명심하여 새겨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난승 노인은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떠나 버렸다. 소년은 스승이 가는 뒤를 쫓아갔으나 2리 쯤 가다가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산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서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다만 없어진 산 위에 오색 안개가 자욱할 뿐이었다. 소년 김유신은 그때서야 그 노인이 자기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늘에서 보낸 사자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수도를 마친 김유신은 난승에게서 받은 보검을 써서 자신이 수도하는 곳에 있던 바위를 마치 두부를 쪼개듯 두 쪽으로 갈라놓았는데 그때부터 이 산을 단석산(斷石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산에는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과 같이 칼로 잘랐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갈라진 큰 바위가 있다.


이야기 2; 단석산은 신라의 명장으로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위치는 당시의 왕성에서는 서쪽으로 23리쯤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 장군이 소년 시절 신검을 얻어 왕성에서 가까운 월생산에 들어 왔다고 한다. 유신은 이 산 속에 있는 석굴에 들어가 가장 용맹한 검술을 익혔다고 하였다. 이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큰 바윗돌을 상대로 정신적 기()를 써서 단칼에 베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 산에 군데군데 베어진 돌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 지금도 흩어져 있다. 여기에 절을 지어 단석사라 불렀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중악의 석굴이 이 단석산의 상인암(上人巖)의 석굴과 일치하는 지는 다소 의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대를 1969년 신라 오악 조사단(新羅五岳調査團)이 조사한 결과 일치한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상인암은 원래 이름이 신선사였고, 주변 바위 면에 새겨진 조각상은 미륵 3(彌勒三尊)이라고 하는 사실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미륵 3존상이란 보살상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신선사에는 자연으로 된 석굴에 미륵 3존을 비롯하여 보살상과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남쪽 바위에는 이를 설명해 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해설에는 주존불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창건 연대 등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어서 확실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림의 양식으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 작품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이 신선사의 주존불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하는 사실은 신라 화랑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 사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당시의 김유신 낭도는 스스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당시의 화랑들은 용화라고 하는 이름을 즐겨 붙였다. 이 용화는 불교 용화 바로 그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 세계는 미륵이 환생을 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을 하고, 설법 교화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법회를 의미한다. 그 당시 향도(香徒)라고 하는 것은 곧 신앙 결사의 의미를 뜻한다. 이 미륵이 출현하는 세계는 바로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이상 세계가 펼쳐진다고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때 화랑들은 바로 이상 세계의 도래를 정신적 염원으로 삼아 강건한 무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앙적 바탕은 바로 젊은 낭도들에게 정신적 기강이 되어 곧 삼국 통일을 이룩했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 상인암에는 미륵 3존불 말고도 마애 조상군(국보 199)이 그려져 있다. 이 석굴은 동남북의 3면이 병풍처럼 되어 있어서 암바위 석실을 이루고 있어서 이 석굴은 하나의 천연 수도처가 되어 있다. 이 암벽에는 크고 작은 10여구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것이 바로 고대 석굴 사원의 경영 형태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서 귀중한 자료로 손꼽고 있다. 아마도 암벽 위의 천정은 목조의 골격과 기와로 덮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인공과 자연이 조화된 석굴 사원이 대두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여러 개의 마애불상 속에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반가 사유의 보살상이다. 이와 같은 반가 사유의 금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한 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신라 전역에서 현재 남아 있는 마애존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좌상 밑에는 인물상 두 구가 동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으로 있다. 이 두 상은 향로와 나뭇가지 모양을 붙들고 있고, 의관은 고대 신라의 복식에 관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어서 매우 중시하고 있다. 추정으로는 이들 두 사람은 이 석굴 사원 조성을 맡고 있던 실제 인물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주전(主殿)의 존상에 공양상을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무엇보다 요행한 것은 씌어진 명문 중에 판독이 가능한 구절이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름이 신선사임이 분명하고, 동시 주존 3존이 미륵불과 보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단석산 마애 조상이 있는 월생산은 625 전쟁에도 확연히 그 의미가 나타났다고 할 수가 있다. 신라 명장 김유신의 용화도 혼과 단석산의 마애 조상 염원으로 인민군은 영천시 외곽 임포(林浦) 일대까지 포진하여 경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