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석굴암 석굴(石窟庵 石窟)

문근영 2015. 10. 1. 00:35

경주 석굴암 석굴(石窟庵 石窟)



정면에서 바라본 석굴암 석굴


멀리서 바라본 석굴암 석굴


본존불


본존불


본존불 정면


본존불 옆면


본존불 뒷면


본존불 상단


본존불 좌대


천정


전경


감실 보살상


감실 보살상


사천왕상


사천왕상(향우)


십일면 관음상


팔부중상


문수보살상과 제석천상


십대 제자상


십대 제자상


인왕상


금강 역사상(향좌)


금강 역사상(향우)


대범천상


지정 번호; 국보 24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진현동 891) 토함산 석굴암

지정일; 19621220

시대; 통일신라 혜공왕

분류; 석굴

내용; 석굴암751(통일신라 경덕왕 10)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창건을 시작하여 774(혜공왕 10)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石佛寺)라고 불렀다. 경덕왕(景德王)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 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 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석굴 외에도 불국사다보탑(국보 20)석가탑(국보 21)황룡사 종(皇龍寺鐘)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경주 석굴암 석굴은 토함산(吐含山)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 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 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 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 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팔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 보살상 2,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11면 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11면 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 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하다.

특기 사항;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은 1995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이야기(다시 태어난 김대성); 지금의 경주 땅 모량리에 경조(慶祖)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여 생긴 모습이 마치 성과 같다 하여 이름을 대성이라 불렀다. 그는 이웃 마을 부자 복안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며 그 집에서 얻은 몇 이랑의 밭을 갈아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점개(漸開; 보살의 경지에 이른 스님)라는 스님이 복안의 집을 찾았다. “스님, 어서 오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신지요?”, “소승 흥륜사(興輪寺)에서 개최할 육륜 법회에 필요한 불사금을 화주키 위해 이렇게 일찍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정성껏 시주하셔서 부디 공덕을 지으시길나무 관세음보살.”, “스님, 저는 베 50필을 공양 올리겠사옵니다.”, “신도가 즐겨 보시를 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도리뿐 아니라 안락과 장수를 누릴 것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점개 스님이 이렇게 축원하는 말을 옆에서 물끄러미 듣고 있던 대성은 급히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아니 무슨 일이기에 숨이 턱에 차도록 이리 급하냐?”, “어머니, 지금 막 어느 스님이 주인어른께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했어요. 아마 우리는 과거에 좋은 일을 해놓은 것이 없어서 이같이 가난한가 봐요. 그러니 지금 보시를 안 하면 내생에는 더욱 가난할 것 아니겠어요? 어머니, 제가 고용살이를 해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였으면 합니다.”, “그래,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도록 하자.” 어머니의 승낙을 받은 대성은 다시 복안의 집으로 달려가 점개 스님에게 밭을 시주했다. 그 후 얼마 안 돼서 대성은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대성이 죽던 날 밤은 유난히 별이 총총했고 재상 김문량(金文亮; ?~711)의 집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하늘에서 큰 별이 그 집을 향해 떨어졌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환생하리라.” 김문량의 집 식구들은 모두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누구 하나 빠짐없이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김문량은 곧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시켰는데 그 날 밤 대성이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김문량의 아내는 태기가 있어 10개월 후 아들을 낳았다. 아기는 건강했고 이목이 뚜렷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왼손을 꼭 쥔 채 펴지 않더니 7일 만에 펴는 것이었다. 아기의 손바닥에는 대성이라 새긴 쇠붙이가 있었다. 김문량의 집에선 아기를 대성이라 이름하고 그 어머니[경조]를 모셔다 후히 대접하고 봉양했다. 재상의 아들로 환생한 김대성(金大城; 700~774)은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환경에서 씩씩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장성하면서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았다. 그 날 밤 산 밑 마을에서 유숙한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어째서 너는 나를 죽였느냐? 내 다시 환생하여 너를 꼭 잡아먹을 것이니라.” 귀신이 당장 잡아먹을 듯 호령을 하자 대성은 두려워 벌벌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냥을 좋아하다 보니 남의 생명 귀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을 것이오니 너그러이.” 대성이 눈물을 흘리며 진실로 뉘우치니 귀신은 화를 가라앉힌 듯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세워 주겠느냐?”, “,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성은 선뜻 맹세를 했다. ‘이제 살았구나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꿈에서 깨 보니 잠자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후 대성은 그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長壽寺; 일명 웅수사)를 창건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성은 깊은 대비원을 발하게 됐다. 경전 공부에 열을 다하고 사찰 참배 기도에 전력하던 대성은 부모 은중경을 읽으면서 효 사상을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일 뿐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할 근본임을 깊이 깨달았다. 대성은 부모를 위해 절을 세우기로 원력(願力; 신이나 부처에게 빌어 바라는 바를 이루려는 염력)을 세웠다. 그는 현세 부모를 위해 불국사 건립의 대작 불사를 시작했다. “사바세계의 불국, 그리고 극락세계와 연화장 세계의 불국 도량을 이룩하여 부모의 명복을 기원하고 나라의 안녕과 모든 자연의 보호, 그리고 나 자신의 구원을 기원하리라.” 김대성의 발심은 드디어 대가람을 이룩했다. 그러나 대성은 불국사 건립으로 자신의 기도가 끝났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시절에 자기를 키우느라 애쓰셨고, 선뜻 밭을 보시하신 전생의 어머니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영령을 천도하고 은혜에 보답키 위해 토함산에 석불사를 세웠으니 그 절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늘의 석굴암이다. 특히 신라 오악의 하나로서 영산으로 알려진 토함산과 그 기슭에 전생과 현세 부모를 위해 절을 창건한 김대성은 그 대작 불사에 신라인의 호국 염원을 발원(發源; 부처나 보살에게 소원을 비는 것)하기도 했다. 그것은 토함산이 군사적 요새라는 점에서 후세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밭 한 뙈기를 공양 올린 공덕으로 김대성은 우리 민족의 존귀한 유산이며 귀의처인 가람을 세워 후세인에게 존앙을 받게 되었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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