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척리 고분군(金尺里 古墳群)
고분군 전경
고분군 전경
고분군 전경
근경
근경
근경
안내판과 고분군
•지정 번호; 사적 43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192-1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시대; 신라
•분류; 고분
•내용; 경주 금척리 고분군은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평지에 있는 신라의 고분들로 크고 작은 50여 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국도 좌측에 21기, 우측에 29기의 크고 작은 고분으로서 주변에는 과수원과 농지 및 민가 다수가 있고 좌측 고분군 너머로는 중앙선 철도와 경부 고속 국도가 지나고 있다. 고분군의 무덤들은 그다지 큰 편이 아니지만 봉토가 완전히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어느 한 고분에 금척(金尺)이 묻혀 있다고 전하는 신라 때 귀족의 묘지들이다. 다만 이곳의 고분들은 모두 경주 시내의 평지 고분들보다 규모가 작아 신라의 낮은 귀족들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특히 신라 6촌 가운데 하나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모량부) 중심이 이곳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고분의 주인들은 이곳의 귀족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정 면적은 130,004㎡[약 3만 9,395평]에 달한다.
금척리 고분군의 본격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봉토의 절반이 파괴된 고분 2기를 1952년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 고분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곽]을 설치한 경주에 있는 고분과 마찬가지로 신라 특유의 적석 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유물은 내부에서 금귀고리・호박옥(琥珀玉)・굽은 옥[曲玉]・철도(鐵刀) 등이 나왔다. 또한 1981년 상수도 공사로 부부총인 1호분에서 금동관, 은제 허리띠, 귀고리, 토기 등 1백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특기 사항;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금자]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 지금도 이 고분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한다.
•이야기;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는 경주에서 국도를 따라 광명과 모량(毛良)을 지나 건천읍을 향하는 10㎞ 지점에 있다. 도로변 양편에 작은 산 같은 고분이 40여 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까운 건천읍에서는 반대로 내려오는 오릿길 지점에 마을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금척리이다. ‘금척(金尺)’이란 글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尺]’라고 하는 뜻이다. 그 옛날 신라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일설에는 박혁거세]이 정사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다. 눈앞에 일곱 무지개가 곱게 나타나더니 금으로 된 황금자 하나를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졸음에서 번뜩 깨어났다. 그 때 꿈속에서 신선으로부터 받은 그 황금자가 거짓말처럼 바로 눈앞에 놓여 져 있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그 자로 재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런 자였다. 나라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그 자를 갖은 사람에게만 한한다고 하는 보물이다. 그 덕택인지 신라는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진평왕 대에 이르러 신라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황금의 자가 있어서 날로 국력이 부강해진다고 하는 소문이 당나라 황제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이것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이 거절을 하고 갖다 바치지 아니하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쳐부수고 말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백성들을 충동하여 여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 왕릉과 같은 고분을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금자가 묻혀있는 금척이다. 왕릉 같기도 하고 봉황대(鳳凰臺; 사적 512호) 같기도 한 큰 고분이다. 왕은 이 어느 고분 속에 자신만 알고 혼자 이 금자를 묻어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당나라 신하들과는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평왕은 급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의 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 밖에 모르는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때의 이야기이다. 고증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황금자가 탐이 나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1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대홍수가 났다. 일본인 발굴단은 부득이 철수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리 고분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거쳐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 금척리 고분은 말없이 그대로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래서 이 근방의 동네 이름을 금척이라고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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