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배동 3릉(拜洞 三陵)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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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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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번호; 사적 219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73-1 남산
•지정일; 1971년 4월 28일
•시대; 신라 및 통일신라 말기
•분류; 능
•내용; 경주 배동 3릉은 경주시 배동 남산(사적 311호)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서쪽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임금인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 53대 임금인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 54대 임금인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아달라왕은 박씨이고, 일성왕의 큰 아들로서 왕비는 내례 부인(內禮夫人)이다. 재위 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84년 3월에 왕이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을 뿐 장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왕릉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신덕왕은 본명이 박경휘(朴景暉)이고,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湌; 5/17관등)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었으며, 왕비는 헌강왕의 딸이었다. 재위 기간은 내외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삼국사기》에는 917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 하며, 《삼국유사》에는 화장하여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경명왕은 본명이 박승영(朴昇英)이고, 신덕왕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은 후삼국의 난립과 함께 국내 정치가 혼란한 시기였다. 《삼국사기》에는 924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에는 황복사에서 화장하여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되어 있다. 지정 면적은 20만 5,289㎡[약 6만 2,208평]에 달한다.
배동 3릉은 모두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전방에 후대에 설치된 혼유석(魂遊石)만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없다. 가운데의 전 신덕왕릉(傳 神德王陵)은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 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 구덩식 돌방무덤)으로 밝혀졌다. 석실은 평면 방형이었고 천정은 활이나 무지개같이 높고 길게 굽은 형상이었으며 연도(羨道)는 남벽 가운데에 달렸는데 석실과 연도 사이에는 판석 2매로 된 문을 달았다. 석실 벽면의 길이는 3.04~3.09m이고, 석실 바닥에서 천정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3.91m였다. 석실 바닥 가운데에는 평면 방형으로 깬 돌을 쌓고 그 위에 두께 5㎝ 정도의 판석 2매를 남북으로 놓아 2인 합장용의 시상(屍床)을 설치하였다. 석실과 연도의 모든 벽면과 천정, 그리고 시상의 측면에는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석실[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황색・백색・군청색・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는데 12지신 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기 사항; 이 능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 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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