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0년 중앙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4. 7. 12:44

심사평 : 김명인 , 황지우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로는 예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정서적 탄력이나 신인다운 패기 또는 개성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는 심사의 자리란 때로는 곤혹스럽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이 주목했던 작품들은 김다솔.강성민.박승철.류남.박성우씨의 시편이었다.
박성우씨의 '거미' 가 당선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습작의 연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응모작에서도 시적 상상에 스며드는 체험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하여 거의 제 솜씨로만 한 채 시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이 응모자의 오랜 단련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다만 사물 앞에서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려는 노력만이 앞으로 제 몫의 장인으로 자신을 세우는 길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당선시 : 거미

 
 
박성우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대학교 양식학과 졸업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 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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