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0년 한국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4. 8. 11:39

심사평 : 이시영 , 정호승 , 정과리



이채운의 「꽃게와 달」은 나무랄 데 없는 한 편의 영상이다. 하지만, 그림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이 작품을 엄호하질 못하고 있다. 「구두의 가을」을 쓴 김여디는 촘촘한 묘사가 돋보였지만, 너무나 익숙하게 보아 온 시풍이라는 게 결정적인 험이었다. 「새벽의 물탱크」 「공포의 빌딩」을 쓴 손현승은 아깝다. 생활의 곤고함과 글쓰기의 괴로움을 같은 이미지에 투영하면서 맞물리게 하는 솜씨가 남다르다. 그런데 지나치게 길다 보니, 이미지들의 연결에 무리가 생겼다. 시가 길어지면 넋두리로 변한다는 걸 명심해야겠다. 마지막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를 쓴 김지혜와 「이발소 그림처럼」의 조정이 남았다. 두 사람 모두 투고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다」는 물건 보관함에 보따리를 우겨넣고 있는 노파를 묘사하고 있다. 묘사는 그냥 형상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염력이다. 묘사를 통해서 운명의 아가리에 삼켜진 삶의 어두운 심연이 저의 역겨운 냄새를 꾸역꾸역 피워올린다. 그것이 읽는 이의 세상 안에 암암히 퍼진다. 「이발소 그림처럼」은 묘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화다. 그가 한없이 낡은 꼴로 그리고 있는 삶이 바로 대화 상대자다. 단조롭고 적막한 묘사가 잠언처럼 읽는 이의 눈 속으로 틀어박히고 있다. 낡음은 무거움이고 무서움이다. 거기에서 도망치려고 허둥대는 동작들도 한갓 먼지로 쌓여, 낡음은 시나브로 두꺼워진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니 낡아가는 것은 생이 아니라 「나」임을 알겠다. 이 시가 대화인 소이이다.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인생인 것이다. 선자들은 조정의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김지혜는 아직 젊다. 젊다는 건 생의 지평선이 훨씬 넓게 열려 있다는 뜻이다.


당선시 : 이발소 그림처럼

 
 
조 정

56년 전남 영암 출생
98년 국민일보 「신앙시 공모」최우수상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신문 「우리」 편집장


이발소 그림처럼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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