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새 천년에는 새 시를? 언어는 그대로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와진다. 마치 생명과도 같다. 그 새로와지는 변화의 중심에 시인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민족의 언어는 행복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작 「우물」(최영신)이 결정되었다.
물론 이 작품이 우리 모두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않을런지 모르나 적어도 이 작품에는 새로운 도전이 있다. 이 도전은 대체로 세가지로 요약된다. 무엇보다 가볍게 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고답적이지 않다. 그 다음으로 이 시는 문제의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시정신을 동반하고 있다.
끝으로 상찬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적절한 관찰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삶 전체를 투사하는, 용해된 정열이랄까 하는 것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모든 매력들은 가령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는 표현과 같은 데에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제 얼굴을 드러낸다. 추억도 복고도 아닌 자기 성찰로서 우물의 이미지가 이만큼 빚어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격언의 풍자」 「흙을 바라보며」등 다른 작품들도 우수하다. 독특할 개성의 시인으로서 자기 세계를 일구어 나가기 바란다.
당선시 : 우물
최영신
1951 금산출생
금산 용문초등학교 졸업
우물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고요로 멈추어 선 우물 속을 들여다본다. 물을 퍼올리다 두레박 줄이 끊긴 자리, 우물 둘레는 황망히 뒤엉킨 잡초로 무성하다. 그 오래 올려지고 내려지다 시신경이 눌린 곳, 깜깜한 어둠만 가득 고여 지루한 여름을 헹구어낸다. 하품이 포물선처럼 그려졌다 사라진다. 내가 서서 바라보던 맑은 거울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몇 겹인지 모를 시간의 더께만 켜켜이 깊다.
지금처럼 태양이 불 지피는 삼복더위에 물 한 두레박의 부드러움이란, 지나간 날 육신의 목소리로 청춘의 갈증이 녹는 우물 속이라도 휘젓고 싶은 것. 거친 물결 미끈적이는 이끼의 돌벽에 머리 부딪히며 퍼올린 땅바닥의 모래알과 물이 모자란 땅울림은, 어린 시절 나를 놀라게 하고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과 물로 아프게 꼬여 간 끈, 땅 속으로 비오듯 돌아치는 투명한 숨결들 하얗게 퍼올리는 소녀, 시리도록 차가온 두레 우물은 한 여자로 파문 지는 순간부터 태양을 열정으로 씻고 마시게 된 것이었다. 밤이면 하늘의 구름 한 조각도 외면한 채 거울 속은 흐르는 달빛, 가로 세로 금물져 가는 별똥별의 춤만 담았다. 그 속에 늘 서 있는 처녀 총각, 어느 날 조각이 난 물거울 속 목숨은 바로 그런게 아름다움이라고 물결치며 오래 오래 바라보게 했다.
고인 물은 멈추지 않고, 시간의 때를 축척한 만큼 새카맣게 썩어갔다. 소녀가 한 여인으로 생을 도둑질당하는 동안, 우물도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퍼올리고 내리던 수다한 꿈들이 새로운 물갈이의 충격으로 흐르다 모두 빼앗긴 젊은 날의 물빛 가슴, 습한 이끼류 뒤집어 쓴 채 나를 바라본다. 쉼없이 태어나고 흘러가는 것도 아닌, 우물 속의 달빛을 깔고 앉아서.
무너진 고향집 흙담 곁에 그리움으로 멈추어 선 우물 속, 젊은 날의 얼굴을 비춰본다. 생은 시 한 줄 길어 올리기 위해 두레박줄이 필요했던가. 인적이 끊어지고 잡초만 무성타한들 그 아래 퍼올려지고 내려지던 환영들, 물그리메의 허사로 증말하는가. 깜깜한 우물 속 어디선가 끝없는 고행의 길로 일생을 바친 소녀의 빈 웃음들이 둥글게 받은 하늘에 기러기 한 줄 풀어 놓고 있었다.
그대 우물은 아직도 갈증의 덫에 걸려 있는가?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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