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0년 세계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4. 7. 12:44

심사평 : 유종호 , 신경림


시들이 틀에 맞춘 것처럼 너무 비슷하다. 산문시와 운문시 또는 한 시에서 산문과 운문을 적당히 배합하는 형식부터 그렇다. 신춘문예를 위한 특별한 텍스트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내용도 서로 비슷비슷하고 알쏭달쏭이다. 억지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시는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억지로 만드는 것, 쓰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냥 만드는 것은 아닐 터이다.

네 사람의 작품을 주목해서 읽었다. 최승철의 작품 중에서는 '편지에게 쓴다'가 가장 재미있게 읽힌다. 제목은 좀 이상하지만 불안하고 무언가 을씨년스러운 작자의 느낌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다. 한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요즈음 유행하는 젊은 사람들의 시와 너무 다른 점이 없다. 이현승의 시는 장황한대로 지루하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근황' 같은 시는 경쾌하고 발빠른 느낌을 준다. 시어의 선택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안정감이 없다.


김성곤의 시는 무언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만추'가 가장 좋은데 좀 산만하다. '다물도' 같은 시가 왜 지루하게 느껴지는지 작자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운의 시는 생활 속에서 가져온 소재이면서도 밝고 따뜻해서 좋다. '낙엽 한 잎'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는데 고달픈 삶의 현실을 다루었으면서도 어둡거나 부정적이지 않고 그지없이 아름답다.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같은 비유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그녀 이야기'도 쌈박한 시다.


이상 네 사람의 시 가운데서 최운의 '낙엽 한 잎'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다른 응모자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 당선작으로 뽑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자기 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평가되었다.



당선시 : 낙엽 한 잎

 
 
최 운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낙엽 한 잎 - 용역 사무실을 나와서




날이 저물고,
마음 맨 안쪽까지 가벼워질대로 가벼워진
낙엽 한 잎이 다 닳아진 옷깃을 세운다
밥 익는 소리 가난히 새는 낮고 깊은 창을 만나면
배고픔도 그리움이 되는 걸까
모든 길은 나를 지나 불 켜진 집으로 향한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마저 도무지 생각나질 않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일수록
실직의 내 자리엔,
시린 발목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으며
새우잠을 청하던 동생의 허기진 잠꼬대만
텅텅 울린다
비워낼수록 더 키가 자라는
속 텅 빈 나무 앞에 가만히 멈추어 섰을 때,
애초에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먼데서부터
우리 삶의 푸르른 날은 다시 오고 있는지!
길바닥에 이대로 버려지면 어쩌나
부르르 떨기도 하면서
구로동 구종점 사거리 횡단보도 앞,
누런 작업복 달랑 걸친 낙엽 한 잎이
한 입 가득 바람을 베어 문다
세상을 둥글게 말아엮던 달빛이 하얀 맨발을
내려놓는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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