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1년 경향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4. 8. 11:39

심사평 : 신경림, 신대철


정감이나 관념을 구체적인 표현없이 실감나게 드러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체적인 표현에 얽매이면 묘사할 수 없는 부분까지 묘사하게 되어 시의 초점이 흐려지게 된다. 체험이 부족한 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비명까지 묘사하려들지 말고 그런 상황을 겪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묘사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여러 투고자 중에서 박옥순의 '개신고물상' 외 7편은 단순하긴 하지만 삶이 묻어나 있고 표현에 무리가 없다. 호흡도 자연스럽다. 당선작 한 편만 두고 본다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른 응모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이 느껴지고 낮은 곳을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눈도 없는 시보다 미숙하지만 눈을 떠가는, 생명 있는 시를 밀어본다.

당선시 : 개신고물상

 
 
박옥순
1974년 충북 청원 출생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 2년 재학중.

개신고물상
 

1


충대우 6로 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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