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9년 경향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4. 4. 12:17

심사평 : 황동규, 이시영


이승희의 [씨앗론]은 응모작 전편에서 가장 뛰어나고 안정된 시적 역량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흠도 실수가 너무 없다는 점이고, 기존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빼닮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자들은 이번에 좀 모험심을 발휘하여 같은 작자의 소품인 [풀과 함께]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에 주저없이 합의 하였다.
[풀]은 60년대 김수영 이래로 너무나 많은 시인들이 불러온 흔한 시적 대상이며 이제 와 새로움을 추가하기엔 낡아버린 이미지인데도 이승희는 그런 터부에 과감히 도전하여 풀을 인간의 오랜 잠재력의 원천인 성애(性愛)의 차원에까지 확대해 놓았다.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는 표현은 얼핏보면 평범한 질술로도 보일지 모르나 거기엔 생명을 가진 것들의 무한한 상기(上氣)를 발견하는 시적 눈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수많은 요설의 언사(言辭)들을 과감히 생략하여 큰 여백을 남길 줄 아는 단순성의 시학이 빛난다.

당선시 : 풀과 함께 / 씨앗론


 
 
이승희
1965년 경북 상주출생. 1988년 서울예전 문창과졸

풀과 함께
 

풀들도

새벽이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지

작은 잎들까지도

이슬을 맑게 밀어내며

긴장을 풀어내곤 한다

그런 날

여지없이 여기저기서

어린 풀들

쑥쑥 머리를 내밀고

손을 들어

저요, 저요 한다

 

그중에 튼튼한 녀석

하나와 단단하게

접붙고 싶다.

 

 

씨앗론

 

1
꽃이 피거나
열매 맺는 일이란 습성이나
본성이 아닌 거야
검은 흙 속을
아주 오래 무던히 걸어 온 시간들이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풀려지는 일이야
 
감자꽃이 피는 것은
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
땅 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
생겨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
 
2
그래도 한번 더 생각해봐. 저 들판, 저 강가, 네가 발 딛고 선 이 언 땅 속 어디에든 바람이 숨겨 둔 풀씨들이 발꼬락을 움직여 무엇으로 일어서려 하는지. 한 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날개의 길이로, 그 불균형으로 바람을 타고 올랐을 것이고, 혹은 가능한 멀리로 자신을 뱉어 내는 그 모든 세상에서 밀려나 아주 쓸슬한 저녁을 맞았을지도 모르지. 잘 보면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분명히 보일 거야. 바로 네가 발 딛고 선 그 자리일지도 몰라. 네가 가둔 것들, 네가 끝끝내 손에 쥔 그것들을 놓아봐.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