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8년 한국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4. 4. 12:17

심사평 : 신경림 , 오세영 , 황지우


손택수씨의 작품은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과 관련된 어떤 추억을 모티브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데, 그것이 추억이기 때문이겠지만 시 전체에 따뜻한 체온을 남겨두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서적 잔여에는 시의 도입부와 종결에서 명백히 드러나 있는 것처럼 얕은 감상주의나 키치의 냄새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을 상쇄할 어떤 시적 내공이 이 작품의 핵에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눈사람의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이미지의 모순어법을 중심으로 이 시를 읽어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지금처럼 어려운 때, 따뜻한 영혼이 속삭여 주는 시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당선자의 정진을 바란다.

당선시 :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손택수
1970년 전남 담양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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