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8년 서울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4. 1. 08:43

심사평 : 김종길 , 정현종


이병욱의 상상력은 드넓은 공간으로 열려 있으면서, 그 공간을 조용한 인간적 숨결로 채우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그 점이 그의 시적 자질을 보여주고 있어서 좋았다. 그러나 당선작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사한 두 사람의 생각이 같지 않았다.
'망해사'는 바다와 절을 불꽃 튀는 긴장속에 놓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대웅전 근처에서만 맴돌아 좀 맥빠진 평범한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보다는 '겨울 공터', '노을 속에서', '밤' 같은 작품이 더 좋아 보이는데 가령 '밤'에서 "지평선을 지우는 밤, 멀리 등불 하나로/ 서 있는 집은 하늘에 걸려 있었다/ 길 끝은 집 주위를 서성이다 흩어졌고/ 내 마음속 알 수 없는 문장들은/ 별 끝에 매달렸다// 달이 모든 길을 끌어다 둥글게 엮고 있었다" 같은 대목은 우주적 쓸쓸함에 물들어 있지 않은가.
 

당선시 : 망해사(望海寺)


 
 
이병욱
1968년 수원 출생, 수원대 서양화과,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망해사
 
 
대나무 잎새 몸 부비는 소리 등에 업고
바다를 바라보는 망해사,
파도가 읊어대는 경전 소리에
처마끝 종소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절간을 지나는 동자스님의
발걸음이 바람에 떠밀리는 마른 잎 같다
파도소리, 묵묵한 바위의 등을 내리칠 때마다
허공을 떠다니는 낮은 소리들
단청 없는 대웅전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걸음도 대웅전 앞으로 밀려간다
낮은 숨소리 웅웅대는 절터를 비추며
조용히 내려앉는 서녘해,
노을빛 단청을 그린다
내 얼굴엔 단청이 그려졌을까
바다로 발을 옮겨 얼굴을 비추면
이내 얼굴을 삼키는 허연 물거품
귓가에 파도의 일렁거림만 맴돌고
바다의 들숨에 석양마저 빨려 들어간다
법구경 읊는 소리도 바다 밑으로 묻혀진 걸까
쉴새없이 어둠을 내뿜는 잔주름 깊은 바다
잔불 소리도 없이 내 속을 비워내고
바닷바람 소리없이 범종을 흔드는 망해사,
아무 말없이 바다 위로 단청을 털어내고 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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