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정현종 , 황동규
선자들이 흔쾌한 마음으로 공감하며 새로운 당선작을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양적 풍요 속의 질적 평준화 현상이라고 할까, 남다르게 자신의 개성을 보여준 투고자를 선별하는 어려움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모자 수와 응모작품이 예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지만, 대체로 고만고만한 작품들이 엇비슷하게 높낮이를 겨루고 있어서 선뜻 당선자를 결정할 수 없었다.
이용규의 '가족일기'는 삶의 경험들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아직 거칠고 단순하다는 점에서, 이성일의 '안개바다'는 섬세하기는 하 지만 종래의 신춘문예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 한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오랜 논의 끝에 두 분을 함께 가작으로 결정한 것은 양자의 장단점이 서로 엇갈리기는 하지만 앞으로 우리 시의 전개방향을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시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개성 시대라고 볼 수 있는 현시단의 긴장 이완 현상을 타개해 나갈 것을 이들에게 기대하기 때문이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가작입선시 : 안개바다
이성일
1967년 주문진 출생, 강릉대 국문과 졸업
안개바다
1
바다 근처다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이 마을의 집들이
유리창을 번뜩이며
바다를 보고 있다 서로
다르게 비어 있는 창 속에서
조금씩 바다가 증발하고
있다 불빛만이 가려진
커튼 사이로 안개를
흘릴뿐
2
한지를 두드리며
누군가의 생을 탁본하는 밤이면
그대가
너무 깊게 박고 간 내 가슴속
못 하나가 쉼표처럼, 그대의
죽음 밖으로 삐져나와
바다로 간다. 아직,
행간을 건너가 보지 못한 생각들이
몇 척 배로 찍혀 정박해 있는
바다. 안개 속이다
고동에서 고동으로
생을 탁본하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만
바다를 떠다닌다. 난파선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바다를 끌고 와
고동, 그 빈 먹통 속으로 확,
죽음을 펼쳐 보이는 안개. 멀리서
안개 경보 울린다. 안개 속에서
안개로 풀어진 자들의 신음,
가작입선시 : 가족일기
이용규
1965년 전남 영광출생, 서울예전 문창과졸업
가족일기
발가락이 가려웠다. 노을 밑으로 낙엽들이
서둘러 떨어질 때, 국문학자가 되겠다던 나의 꿈들이
허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밟아 보았다.
길은 덜 자란 마늘밭 하나 건너지 못하고 내려갔고, 그날 밤
법성포로 떠난 아버지의 굵은 손끝에 매달린 굴비 한 두름
짜게 절여두겠지. 밥그릇 속에 들어가 있는
쉰 밥풀 같은 하루, 밑으로 가볍게 뿌리를 내리고
여기저기 유채꽃같이 찾아오는 봄.
풀어지겠지, 개울에 갇힌 은어 몇 마리쯤.
언덕부터 고추꽃들이 매운 바람으로 불고, 아직 덜 꺼낸
유품 같은 우물을 왔다. 그날 돌아가신 할머니 팔까지 올라오던
물결, 씻고 행구는 나의 발자국 멀리 흘러갔다.
자취방은 어머니 근심이 기어나오던 그날 같은 배고픔.
신문배달을 했다. 셔터 밑으로 자꾸만 쑤셔넣던 체첸반군들.
군에 입대한 형으로부터 엽서가 오고
가지런히 기댄 등교길이 즐거웠다.
일몰은 눈앞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애들은 하나씩의 풍경들을
들고 들어가 꿈을 만들고, 껌 씹는 낙엽을 밟으며
술집 누이가 들어왔다. 그날 밤,
기도의 형식으로 버려진 수난들이 일기장 속에 접혀 들어갔고,
이유를 몰랐다.
신발을 신지 않은 개들이 고향을 향해 떳떳하게 짖어대고
기쁜 꽃들로 나가 계절을 바꿀 수 있는 이유를.
세월은 넘지 못하는 것일까. 누이의 이마 하나,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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