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황동규 , 김주연
마지막으로 두 편의 작품이 남았다. 손필영의 '동소문 동'과 박균수의 '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인데, 이 두 작품은 각 각 전통적 서정과 그 와해라는 서로 반대되는 자리에 앉아서 그들 나름의 필연성을 조용히 주장하고 있는, 주목할만한 시들이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220번지 첫번째 길가 7호'는 이 시인의 다른 작품 '관찰' 등과 함께 더 이상 서정성의 세계가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 중심부에 대한 예리한 묘사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
섬세한 관찰력과 구체적인 사물의 장악은 시인의 저력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절제된 주관과 감정은 그것이 불가피해진 세계를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와 달리 '동서문동'은 도시문명의 그늘과 그 안에 가늘게 잠복해 있는 인간들의 온기를 서정적으로 감싸고 있는 예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계의 구조적 본질을 스치는 보다 은밀한 시선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응모작 대부분이 이 두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데, 지양과 통합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당선시 : 220번지 첫 번째 길가 7호
박균수
1968년 경남 울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220번지 첫 번째 길가 7호
안에서는 도무지 날씨를 짐작할 수
없었다 창틀에는 평행한 세로줄 위에 하트 모양이 붙어 있는 쇠창살이
있었고 먼지들 안쪽에 난시의 창문이
자기 눈알의 크기만큼 위로 오르는 철계단을 사선으로 잘라
보여주었다 그것들 사이로 그을 수 있는 몇 개의 직선 위에 시신경을
올려놓고 우산이 지나가는지 살펴보았다 언제나
한 개의 형광등과 두 개의 백열등과 또 한 개의 할로겐 등을
같은 채널의 라디오와 함께 켜 놓았고 그것들은 밤새
흰색 벽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가내수공업으로 거미줄을 짰지만 감각은
입자들과 파동들 사이에 있었다 아랫쪽에서 발목을 울리는
소리가 났고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바닥이 조금씩
높아졌다 천정에서 당황한 발자국이 자정의 정수리를
가로질러갔다 한달에 한번쯤 등이 구부정한 사내가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두드렸다 살충제라고 흰 마스크가
말했다 분무기를 짊어진 사내는 구둣발로 걸어들어와 후미진 곳 곳곳에
살색의 약을 뿌렸다 생각날 때마다
벤자민 화분에 반 컵의 수돗물을 주었다 그것은 천천히
어린 잎들부터 말라죽어가고 있었고 물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화분이
놓인 창틀은 내내 축축했고 그곳으로 잠깐 늦은 오후의 햇빛이
예리한 각도로 쓰러졌다 멀리 갔다온 날이면
썩는 냄새에 빨리 잠들었다 인기척에 깨어 나가보면
낯익은 벌레의 알들이 문가에 버려져 있었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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