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7년 동아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4. 1. 08:37

심사평: 정진규 , 정과리


시가 다시 부활을 꿈꾸는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시를 당선작으로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경임의 시는 무심코 읽으면 시의 전언을 자칫 놓쳐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적요하다. 그 어투가 감옥의 풍경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 시인은 거위로 변한 오빠들을 위해 베를 짜는 소녀처럼 언어의 직물을 한 뜸 한 뜸 수놓아 간다. 그 직물에 성긴 데가 없다는 것은 시의 장점이지만, 때때로 좀더 리듬감 있게 벼려질 수도 있었을 구절들이 산문적으로 늘어나 버린 것은 시의 흠이다.
그에 비해, 배용제의 시는 선명하다. 텔레포트라는 가상현실을 제재로 하여 미래에 대한 환상, 거듭 꺾이는 희망들, 헛된 희망의 반복 속에 갇혀 버린 자아의 '견고한 공포'를 썩 화려하게 합성하고 있다. 그 화려함이 지옥같은 의식의 고뇌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지옥 속의 투쟁을 좀더 치열하게 밀고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동아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 가운데는 워낙 우수작이 많아 주최측의 양해 아래 가작 한 편을 더 고를 수 있었다. 배용제의 시를 당선작으로, 이경임의 시를 가작으로 민다.
 

당선시 :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배용제
1963년 전북 정읍 출생, 서강대 신방과 졸업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TV에서 본 스타트랙이라는 영화, 몇 세기 후라던가? 물체나 사람이 (혹은 그냥 생명체) 원반에 올라 스위치를 누르면 원자분해되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그리고 목적된 곳에서 정확하게 재결합되어 나타났다. 지옥이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1
 
나는 자주 꿈을 꾼다
의식의 미세한 입자들이 신비로운 곳을 향해 날아간다
환상 속 연인과 동침을 하며 춤을 춘다
때때로 예언자처럼 먼 미래에 미리 가보곤 고개를 끄덕인다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다
스핑크스 형상으로 사막의 모래바람에서 우우거리거나
털 없는 늑대가 되어 붉은 달을 물어뜯는다
암흑의 전당포에 들러 추억을 저당 잡히고 새로운 길을 산다
흘러나간 그림자 모두 거친 발톱을 세운다
그러자 앙상한 뼈와 해골을 뒤집어쓴 내가 뒤척인다
그곳에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단세포 같은, 벌레 같은, 바람 같은, 짐승 같은, 로보트 같은, 석탑 같은, 공룡 같은, 괴물 같은......
검은 석실에 갇혀 바둥거린다. 나는 겁에 질린
영혼을 꺼내 짓이기면서 사나운 울음소리를 낸다
출구없는 꿈을 벗어나려고
의식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댄다
오, 꿈은 이토록 견고한 공포를 향해 나를 보냈던가
어쩌려고 내 생은 한동안 꿈의 의식을 건설했던가
잠자리에 누워 채 걷히지 않은 비명의 메아리를 토한다
나는 절망의 입자로 재결합된다
몸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고 있다
 

2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속 상상이 전송되고, 지친 희망들이 전송되고, 엄청난 양 의 기억들이 날마다 미래를 향하여 전송되고, 내가 가진 자그마한 종교가 두려움 또는 가벼운 신앙으로 전송된다. 그리고,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가작 입선시 : 부드러운 감옥

 
 
이경임
1963년 서울출생, 서강대 영문과 졸업

 
부드러운 감옥
 
아침, 너울거리는 햇살들을 끌어당겨 감옥을 짓는다. 아니 둥지라고 할까 아무래도 좋다 냄새도 뼈도 없는, 눈물도 창문도 매달려 있지 않은 부드러운 감옥을 나는 뜨개질한다 나는 높은 나무에 매달리는 정신의 모험이나 푸른 잎사귀를 찾아 먼 곳으로 몸이 허물도록 기어다니는 고행을 하지 않는다 때로 거리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을 바라본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잎새들의 춤이 바람이 불 때면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잎새들은 우우 일어서며 하늘 속으로 팔을 뻗는다 내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의 모서리나 계곡의 풍경이 나를 밟고 걸어간다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걸어나가고 싶다
 
거리에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은 따뜻한 새알 같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가로등 쪽으로 걸어간다 지상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로등을 지나쳐 지하도 입구 속으로 사라진다 옆구리를 더듬어 본다 하루 종일 허공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기어 나온다 거미의 그물을 뒤져본다 낡은 점자책이 들어 있다 어둠 속에서 나의 뻣뻣한 손가락들이 닳아진 종이 위의 요철 무늬들을 더듬는다 몇 번을 솟아오르다 또 그만큼 곤두박질친 다음에야 희망이란 활자를 읽어낸다 문장들이 자꾸만 끊어진다 길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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