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 유종호 , 정현종
신춘문예 작품이 읽는 사람을 그야말로 신나게 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나은 작품을 썩 탐탁지 않지만 뽑는 일이 많다고 해야겠는데, 박남희의 작품을 읽는 일은 그 흔치 않은 경우에 속하는 것이었다.
'은지화의 꿈'의 '하늘이여 너무 쉽게 어두워지는/ 저녁하늘이여 새를 숨기고/ 나를 숨기고 내 안의 그리움을 숨기고/ 동짓달 소나무 숲을 헤치고 떠오르는/ 달이여 달 속의 아내여'도 일품이지만 당선작으로 고른 '폐차장 근처'는 이른바 문명 세계의 황폐 - 경쟁과 속도와 소유욕과 자동성 따위가 만드는 저 신경증적 질곡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느낌을, 어떤 희생과 지복의 느낌에 흠뻑 젖게 할 만큼 노래하고 있다. 생명의 원천인 저 자연의 그야말로 유장한 리듬 속에 있는 사람의 행복은 동시에 도시, 과학기술, 경제 따위들로 특징 지워지는 현대생활의 황폐와 불건강한 징후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배가되는 것이기도 하다.
당선시 : 폐차장 근처
박남희
1956년 출생, 숭실대 국문과,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폐차장 근처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 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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