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2년 중앙일보 당선작

문근영 2015. 3. 12. 08:00

심사평 : 김주연 , 오세영


이번 신춘문예에 응모작들을 읽고 전체적으로 느낀 소감은 신인들의 시적 관심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인들은 항상 시대를 예감하는 눈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이러한 변화는 우리 시단에 새로운 경향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우선 시들이 들떠 있거나 과격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사회나 현실에 대한 발언이 줄어들고 시적형상화에 있어서도 메시지 전달 중심의 산문적 어법이 사라진 것 등은 그 중 두드러진 특징이다.
조재영씨의 '하지'나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는 신춘문예의 이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우선 아름다우며 시의 미학적 완결성이 돋보인다. 삶의 일상적 정서를 건강하고 통합된 세계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사물을 보는 눈이 날카로우며 그것을 언어로 표출해내는 형상력도 뛰어나다. "젖은 하늘 한 귀퉁이 지그시 눌러본다"와 같은 표현은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한가지 미흡하다 생각되는 것은 사상성 같은 것인데 아직 신인인 까닭으로 그의 시적 성숙을 기대해 본다.
 

당선시 : 하지 /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조재영
1965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하지
 
아이들이 돌아간 빈 놀이터에
누군가 그리다만 집 한 채
누워 있습니다
막대기 하나 주워들고 금을 긋다보면
그 집은 점점 커져 일어서고
덩그마한 집 한 채 저녁 불빛에
따스합니다
방문앞 신발 두켤레
입을 오므리고 기대 앉아 있습니다
어스름한 달무리 지붕을 덮으면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불빛도 꺼지고
가물가물 비가 내립니다
비에 젖은 신발 두 켤레
서럽게 정답습니다
밤이 너무 깁니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화영운수 개봉역 차고
줄지어 서 있는 무표정한 시간들
사이로 비가 내린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기울어진 하늘의 한쪽을 밀어 본다
여학생들 플라타너스 밑둥을 툭툭치며
비를 피하고 깔깔 웃고
잎잎에 올라앉은 하늘은 엉덩이를 들썩인다
플라타너스 흔들리며 흔들리잖으며
조금 내려앉는다
바람불면 다른 하늘이 올라타기도 한다
가지가 휘어 땅 가까이 닿을 듯하다
비그친 하늘은 어느새
쏟아낸 빗줄기만큼 가벼워지고
나무 등허리 주위로 넓어지는 한낮
말끔히 씻긴 차들이 시동을 건다
사람들은 차에 오르며
젖은 하늘 한 귀퉁이 지그시 눌러 본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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