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3년 경향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3. 14. 10:43
심사평 : 오세영 , 김종해


정덕재씨의 '감기유감'은 평범한 일상적 소재 속에서 삶의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는 데 탁월한 인식과 감성을 보여주었다. 다소 호흡이 완만하다는 느낌이 있으나 그의 깊은 상상력이 이를 충분히 이끌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전체적으로 투고 작품들은 미학적 조형성, 통합된 감수성, 표현의 절제성, 사상성 같은 것이 부족했다. 특히 관념적인 진술, 사변적인 토로, 해체된 자아의 불건강한 묘사는 최근 신인들을 중심으로 유행되고 있는 우리 문단의 시류성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만들었다. 신인은 기성시단에 새로운 비전을 열어주는 자신만의 개성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당선시 : 감기 유감

 
 
 
정덕재
1966 충남 부여 출생, 배재대 국문과 대학원

 

감기유감
 
며칠간의 감기는
코에서 목으로 왕복하며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변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약을 먹기로 했다.
콘택 600 혹은 판피린을
조제하는 TV 앞에 앉아 있다가
소망약국 앞을 머뭇거리다
병원으로 향하는 것은
가운을 입지 않은 약사 때문이었을까
식당과 정육점 사이에서
약 냄새를 풀풀거리지 못하는
옅은 기운 때문이었을까
 
녹색 간판의 세지의원 2층 계단을 오르며
세지는 딸 이름일까
아내에게 감추고 싶은 첫사랑의
여자일까
힘없이 굽어지는 무릎이 관절염일까를
생각하며
손가락이 긴 의사를 만났다
감기 같은데요. 순간 아니다.
감기 걸렸는데요 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스스로 진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선고의 두려움을 베어내기 위함이다
두려움의 상처에
먼저
불을 지르고 맞불을 기다리는
이것은 소독이 아니다
온몸을 달구는

살.
모두들 전염의 불덩이 하나씩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불신하지 않는 것은
죄라며
병원 복도에서 기침을 하고 있다.
감기가 아닐지 모른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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