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1991년 경향신문 당선작

문근영 2015. 2. 21. 08:19
심사평 : 김종해 , 마종하


전달되지 않는 자기만의 몽상적인 관념과 정제하지 않아 생경한 산문으로서도 덜된 문맥의 부정확 등이 응모작들의 일반적인 맹점이다. 당선작 '황야의 정거장'은 앞의 작품에 비하여 절망 벗기기의 환유, 삶의 중압감을 빠져나가는 정신의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 이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언어의 다의성과 이미지의 복합구성이다. 자칫 산만한 난해성과 이미지의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는데도 지은이는 범상치 않은 수법으로 처리하고 있다. 노동시에서 일부 보여지는 단세포적 경직성을 세심한 감각으로 교직시키면서 이미지의 다층구조를 풍자적 해학의 언어망으로 이끌어 읽기 수월한 유연성마저 지니게 하는 것이다.
 

당선시 : 황야의 정거장

 
 
서규정
1949년 전북 완주 출생, 김제고 졸업

 
황야의 정거장
-- 복지국가로 가는 차표를 어디서 팔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잔털 털 보숭보숭한 여공 하나 데리고 떠나고 싶어 앵두꽃 피는 시절 기쁨과 슬픔마저도 탕감하는 저 반달 달빛이 스며드는 기숙사에서 앞장 뜯어진 노동자 천국을 읽으며 뒷장을 다 넘긴 줄도 모르고 방바닥을 집어 넘기는 손 떨리는 이 경련의 세월을 공녀야 공녀야 어디만큼 가고 있었니
 
천국은 멀어 천국은 멀어 부자가 된 사람들은 이제 강가에 나와 천막을 치면 우리들은 바느질 같은 발자국을 듬성듬성 비켜 남겨야 하네 아직은 젖과 꿀이 흐르지 않는 강가에서 바람의 손이 닿지 않는 물 속 깊이 씨앗처럼 숨어 있는 까만 눈동자를 찾기 전에 급한 물결은 어디로 가 땀방울로 수출되는 강물아
 
일어서는 것도 함정이었네 보이지 않는 발자국부터 시작하는 우리가 저 담벼락에 그려진 지상낙원 뼈저린 어깨로 기대어 보는 보라빛 기둥 무지개가 꽃가루처럼 부스러지며 페인트로 밝혀져 있는 공장 담벼락 희망이 무지개처럼 솟고 상식이 모래알처럼 깔린 신작로를 따라 긴 긴 머리 검은 연기처럼 날리면서 가고 있을 공녀야 그대 눈썹은 웃고 있는가 울고 있는가 여기는 벌판과 환희가 스쳐간 페인트 공화국
 
가자 가자 약속의 땅 은행잎 닮은 손바닥이 시간의 차디찬 엉덩이를 때리듯 담벼락에 한 폭 낙관으로 찍힐지라도 맨처음 발자국은 버려야 하네 저 고개 넘어가는 잠의 산맥은 넘어야 하네 아침햇살이 쨍그렁 기숙사 유리창을 깨뜨리기 전에 가자 가자 달빛을 타고 미끄러지며 스르르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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