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12년 《현대문학》신인추천 당선작/김영미,이상협

문근영 2014. 11. 19. 12:13

2012년 《현대문학》신인추천 당선작

 

 


파수(破水) / 김영미

 


일찍이 나는 물의 파수꾼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풀장에 다이빙하고 싶어
수박을 던지면 젖살 같은 과육이 흩어졌다
어기면서 지킬 것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은 매번 덜 익은 계절
물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법을 배우며
눈물을 다듬었다


경계할수록 너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모래내 9길 / 김영미

 


너는 문제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네가 더 어렵다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독서신문에 찍힌 학교의 주소를 본다
모래내 9길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
모래내 그 길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곁을
혹은 내 앞을 지나갔을까
길 위에서 흩어져버린 모래알들
창밖으로 경의선 열차가 지나갔다
백 년 전에도 서 있던 축구 골대처럼
나는 이끼 빛으로 녹슬어
내 기억은 어느 밤 저 열차를 탔던가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이 있다
나는 막 출발하려는 기차처럼 기침을 시작했다


너보다 더 어려운 무엇은 없었다

 

 


석양의 식탁 / 김영미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똑 소리 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너머 / 이상협

 


제자리로 돌아온 새는
어제의 새가 아니었다


돌아와 마주한 가족들은
처음 보는 다정한 사람들이 되었다


물 웅덩이는 나를 비춘다
내가 없던 시간에도
너머의 나는 잘 있는지


그의 등에서
곤란한 진심이 그림자처럼 빠져나온다
등은 그를 더욱 그답게 마무리한다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이런 말투로써 나는
온전히 사랑의 눈동자를 지니게 된다


너머의 내가 철봉을 넘을 때
말아 쥔 손바닥에서 이편의 나는 피 냄새를 맡는다


나를 덮어쓴 채
신발 끝으로 그림자를 문지르기 시작한다


 

 

백자의 숲 / 이상협

 

 

불탄 목적지는 이해하기 쉽고 나는
도착하는 길이 계절마다 다릅니다


구운흙은 울기 좋습니다
깨어질 듯 그러했습니다


밖에 누구 있나요
안에 누구 없습니다
나는 나의 작은 균열을 찾는 중입니다


금 간 서쪽 무늬를 엽니다
나는 획의 기울기를 읽는 데 온 밤을 씁니다


중심은 맺혔다 사라집니다
나는 안팎이 없습니다


나는 누워 처음 나의 중심을 봅니다
검은 모자 떼가 날아갑니다
불쏘시개로 흰 뼈를 깨뜨리고
경계에서 나는 태어납니다

 

 

 

후유後有 / 이상협

 


   잔기침으로 꽃을 뱉는다 꽃이 켜지자 방금 생각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생각만이 궁금하다 노래는 들을수록 닳는다 살갗의 숨구멍들이 무료할 때 음악은 나를 듣기 시작한다 욕조의 물처럼 우연히 넘쳐나는 누군가가 하수구로 흘러간다 초침 소리처럼 나의 소리가 무서워진다

 
   마당은 천천히 움직인다 감잎은 각도를 조용히 꺾는다 축적이 다른 지도를 들고 서로의 눈금을 센다 한 뼘 안에서 끝나는 거리를 잰다 국수처럼 하늘로 늘어진 허연 길에서


   낙화 : 책 바깥으로 날아가는 각주들
   여행 : 몸이 밖을 떠돌 때 안쪽으로 더 멀리 가는 노동
   비행 : 날면서 낡아가는 공중전화박스 
   블랙박스 : 모든 사건은 원인을 통제하도록 설계되었다


   나무 속에 앉아 날개를 기르는 동안 나는 희박해진다 꽃의 허벅지를 보았다

 
  * 후유 : 열반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미래에 받는 미혹의 삶.

 


이상협 시인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졸업. 앨범 《에고 트립(Ego Trip)》을 발표하면서 2010년에 가수로도 데뷔. 현재 KBS 1FM (93.1 MHZ) 음악풍경 글, 진행

 

 

—《현대문학》2012년 6월호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김미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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