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리토피아》 2012년 여름호 집중조명, 배진성 신작시 12편|

문근영 2014. 11. 19. 12:12

 

 

사과꽃망울

 

득음을 위한 독공이 한창이다

 

사과나무 속에서

고려청자 굽는 소리 들린다

조선백자 깨뜨리는 소리 들린다

수없이 많은 사금파리들이 쌓인다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를 미리 빚어보고 구워보고 깎아본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성질 급한 봄꽃들이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도

사과나무는

진득하니 사과나무 속에서 사과만을 만들고 있다

 

울컥,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탁발

 

세한도만 그렸다

유배지에서

오직 세한도만 그렸다

 

말도 잃었다

울음도 잃었다

나는 어느새 소나무가 되었다

 

사람 밖에 있던 나는 사람 안으로

길 밖에 있던 나는 길 안으로

이제 돌아가련다

서툴게라도 말하고

서툴게라도 통곡하련다

 

세한도 밖으로

솔가지 하나 빠져 나온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말씀이 내려오신다

하느님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와 쌓인다

 

눈이 내린다

눈의 발뒤꿈치가 조심스럽다

노랗게 익은 귤이 병아리처럼 파고든다

감귤나무 위에도 사뿐히 눈이 내려쌓인다

감귤나무 아래 허름한 개집을 눈이 기웃거린다

개집 안이 은총으로 가득하다

 

마리아의 자궁처럼 어미개의 문이 열리고 있다

문밖으로 살짝 내미는 발가락

멈칫, 하다가 슬며시 첫발을 내딛는다

 

미끄러운 세상의 길을 핥아주는

어미개의 혀,

 

고요히 눈이 쌓인다

 

 

 

 

수혈에 대하여

 

가슴을 열고 심장에 칼을 대어본 사람은 안다

피 속에는 혈장과 혈소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하지 못하는 엽록소가 가득하다는 것도 안다

 

큰 수술을 받고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인공호흡기와 함께 회복실에서 깨어난 사람은 안다

 

피, 엽록소 속에는 이미 단풍으로 가득함을 안다

피는 처음부터 붉고 노랗고 푸른 단풍잎임을 안다

 

링거와 영양제와 혈액주머니 같은 단풍도 다 지고

뼈만 남은 나무는

겨울에 땅 속보다 하늘이 더 춥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겨울나무는 하늘에 사는 식구들을 위하여

스스로 하늘에 주사바늘을 꽂고 하늘에 수혈을 한다

 

땅 속의 따뜻한 혈액을 수혈 받은 별들이 눈을 뜬다

 

며칠 후면 고드름도 땅에 주사바늘을 꽂고

하늘의 영혼을 지상에 사는 식구들에게 수혈할 것이다

그렇게 땅과 하늘은 피를 나눈 형제로 함께 살 것이다

 

 

 

 

등나무

 

당신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떠나버린 등나무였다

등만 보이던 그 등나무가 오늘은 등꽃을 켜고 있다

 

 

 

 

 

이어주는 섬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섬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밟고 지나간다

 

내 안에 섬들의 발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섬들의 발자국이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도가 있다

내 가슴 속에 이어주는 섬이 있다

나는 징검다리 같은 이어도가 된다

 

 

   

 

 

새 입술이 달다

 

이어도 오두막 앞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다

 

까치 두 마리 날아와

감 하나를 함께 쪼아 먹는다

 

이 요망한 것들이

감이나 쪼아 먹고 갈 일이지

혼자 사는 내 앞에서

기어이 뽀뽀를 하고 난리다

 

감보다 먼저 몸이 더 달아오른다

에이, 이 몹쓸 것들 같으니라고

 

지나가던 바람이

키득거리는 소리에 감이 떨어진다

나는 새들이 먹던 감을 주워 먹는다

 

아, 참 달다

새 입술이 참으로 달고 맛있다

 

 

 

 

발로 하는 세수

 

산책은

씻김굿이다

발로 하는 세수다

발로 씻는 씻김굿이다

발로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이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다

나는 날마다 내 발로 내 눈을 씻는 씻김굿을 한다

 

산토끼 한 마리 가만 앉아서

발로 세수를 한다

산토끼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산 새 한 마리 가만 앉아서

깃을 다듬던 부리를 발로 씻는다

산 새 한 마리 산책을 하고 있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바람소리가 내 몸을 씻어준다

쑥 향기가 내 코를 씻어준다

하늘을 쓸고 있는 나무들이 내 눈을 씻어준다

꽃들이 내 영혼을 씻어준다

하늘이 하늘까지 내 길을 닦는다

나의 산책은 바리데기를 만나

길을 닦는 씻김굿이다

바람소리가 나를 씻어준다

물소리가 내 귀를 씻어준다

내 발이 나를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눈을 씻어준다

만나는 그대가 내 길을 닦아준다

 

나를 스스로 씻겨주는 씻김굿 춤이다

나의 산책은 스스로 씻는 씻음굿 춤이다

 

 

 

   

 

 

파도무늬

 

모래밭이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파도 속으로 떠나간

 

모래알 하나 때문에

 

모래알 하나가 평생

 

파도 속을 뒤지고 다닌다

 

모래알 하나가

 

모래알 하나를 찾아다닌다

 

평생 찾아서 헤맨다

 

그리하여 모래밭은 온통

 

그를 찾아다닌 길로 가득하다

 

가슴속 모래밭까지 온통 파도무늬로 가득하다

 

 

 

 

 

나무를 본다

 

나뭇잎은 손일까 발일까 나뭇잎은 손 같기도 하고 발 같기도 하다 새들이 벗어놓은 신발 같기도 하고 장갑 같기도 하다 나뭇잎은 또한 입 같기도 하고 귀 같기도 하고 코 같기도 하다 태어날 때 눈이었던 나뭇잎이 자꾸만 코가 되고 입이 되고 귀가 된다

 

나뭇가지는 팔일까 다리일까 나뭇가지는 팔 같기도 하고 다리 같기도 하다 새와 새집을 끌어안고 포옹하는 것을 보면 팔 같은데, 나뭇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끼워 시집을 보내거나, 접을 붙이거나, 열매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면 다리 같기도 하다

 

나무 기둥은 몸통이 맞는 것일까 그 가슴 속에 심장은 있는 것일까

 

나무뿌리는 발일까 손일까 가장 낮은 곳에서 떠받들고 살아가니 발 같은데, 평생 흙만 파먹고 살아가니 시골 어머니 손 같기도 하다

 

다시 나무를 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보니 나무가 나무로 보인다 그 동안 나는 나무를 자꾸만 사람으로 보려고 해서 나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무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하나뿐인 나무인 것이다

 

 

 

 

 

항아리

 

가랑비에 젖고 있는 가랑잎 한 잎

젖은 몸으로 겨우 묵언 수행 중이다

 

바다에 던져졌던 빈 항아리 하나

20년 째 묵언 수행 중이다

뚜껑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그나마

허술한 밑까지 통째로 빠져버렸다

 

처음 10년 동안은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시 10년 동안은

수없이 많은 말을 하여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다에 빠진 빈 항아리 하나

20년 째 몸과 마음을 비우고 있다

뻥 뚫린 가슴 속으로

물고기들이 헤엄쳐 지나가고

푸른 바닷물이 수시로 넘나들었다

 

하늘바다에 머릿속까지 감고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 가까스로 묵언 수행 중이다

 

 

 

 

액자

 

오지 않을 사람을 밤새도록 기다리는 때가 있다

오지 못할 사람을 대책 없이 기다리는 때가 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새벽이 액자처럼 걸려있다

 

방 안에 액자 하나 걸려있다

사연이 참 많은 액자 하나 걸려있다

나무틀 액자 하나 아침처럼 걸려있다

내 왼쪽 가슴 속 깊이 박혀있는 못 하나에

액자 하나 지금까지도 걸려있다

 

그 액자 속에 있던 사람 대신

지금은 내가 들어가 갇혀있다

1986년 이었던가 1987년 이었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 왔던 내가 들어있다

한라산 이었던가 어느 오름 이었던가

안경 쓴 내 뒤로 소들이 걸어가고 있다

 

시여, 내가 낳은 시들이여!

황소의 쟁기질처럼 끊임없이 땅을 갈아엎으며 건강히 자라는 일꾼이길 바란다

이런 글자들도 함께 갇혀서 기침을 하고 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를 내린다

내 가슴 속에 갇혀있던 액자를 꺼낸다

그 액자 안에 갇혀있던

나와 나의 글자들을 꺼내어 해방시킨다

그리고 다시 비어있는 액자 틀만 벽에 건다

그 빈 액자에 느닷없이 새로운 아침이 들어앉는다

 

나는 이제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오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가 스스로 아침 같은 사람에게로 간다

 

아침 시에게로 간다

 

 

 

 

  

 

시인의 말

― 꿈과 이어도 공화국

 

 

*

나에게는 작은 꿈이 하나 있다

나는 아름다운 숲을 하나 가꾸고 싶다

그 숲에 나무를 심고 나무를 가꾸며

나무처럼 살고 싶다

그 숲 속에 조촐한 집을 하나 짓고 싶다

삶에 지친 영혼들을 위한

쉼터를 하나 만들고 싶다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그들과 함께

그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다

숲에 나무를 함께 심으면서

또 다른 희망의 나무를 심고

사랑의 씨앗을 뿌려주고 싶다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그들과 내가 함께 심었던

그들의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안부 편지와 함께 가끔 보내주고 싶다

세상으로 돌아간 그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자라나는 나무를

보기 위하여 다시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직접 올 수 없더라도

늘 가슴 속에서 함께 자라나는

자신의 그 나무 때문에

더욱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끝끝내

함께 가야할 길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다

 

*

이어도는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너와 나를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우리들을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꿈과 현실을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현실과 미래를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섬이다

이어도는 가장 멀리까지 이어주는 섬이다

그리하여 이어도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런 이어도 들어가는 항구에

이어도 오두막을 먼저 짓는다

그런 이어도 들어가는 숲 문에

이어도 베이스캠프를 먼저 친다

이어도 오두막은 성과 속을 이어주는 섬 문이다

이어도 오두막은 성과 속을 이어주는 산 문이다

이어도 오두막은 성과 속을 이어주는 오솔길이다

우리들을 이어주는 이어도 공화국을 위하여

이어주는 이어도 오두막을 먼저 만들기 시작한다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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