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시학 2005년 포엠토피아 신인당선작
우산과 유산 (외 4편)
- 이 신
백화점을 다녀오는 길에 소낙비를 만나
백화점 앞에서 젖고
백화점 아래서 흠뻑 젖네
한 달에 하루쯤은 곤궁한 웅덩이가 있네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방울
젖어드는 바짓단
식어가는 체온을 감싸줄 유산이 없네
내일을 가려줄 우산이 없네
투투투, 총알같은 비
따갑게 퍼붓는 거리를 우산 쓰고 걷다가
흙탕물을 튀기고 가는 스포츠카를 만나서
나는 유산이 없다고 중얼거리네
두터운 유산,
따뜻한 우산이 없는 불안에 젖네
검정 우산은 손에 쥐고 있네
내 몸을 가려줄 우산은 어디에도 있네
비 밖에 비,
몸 밖에 몸,
나를 가려줄 우산은
왜 우산이 아니고
끝내, 유산일까
한 생의 불안한 몸이 걸어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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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삭제
사라지는 것은 즐겁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모습을 감추었다, 즐거웠다
기억되는 것보다 지워지는 방법이 어려웠다
송곳이나 칼끝으로 내 몸을 긁는 일,
상처 입은 표면에서 어머니는 조용히 아팠다
어머니라는 딱지를 떼어낼 때 내 아픔은 통쾌했다
나의 왼쪽을 클릭해서 어머니를 불러낸다
나의 오른쪽을 한번 클릭하면 밥이던 어머니와
돈이던 어머니가 폴더를 열고 나온다
좋은 순간만 남겨두고 삭제, 낡은 어머니는 휴지통으로
버려지고 그 모습이 즐겁다
달콤한 삭제, 쿨한 삭제
키가 작다는 이유, 교양이 없다는 이유
나는 똑바로 서 있는 인물인데
풍경인 어머니가 30도는 틀어져 있다
현재 이전의 나도 삭제한다
나는 소용량의 하드디스크이므로
선택적인 기억은 불가결했으므로
선택적인 기억상실도 숙명이었다
오랜 기억의 방법도 삭제한다
다시 씌어져야 하는 어머니는 비로소 따뜻하다
새로운 기억은 삭제된 기억 위에 집을 짓는다
아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재혼으로부터 유래된 선택적 기억상실증
나는 매일 어머니라는 이름의 옛 파일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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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노점상
지하도 입구에 벙어리 사내의 솥이
가스 불 위에 걸려있다
허름한 행색의 그는 하루 동안 서 있는
불법 가건물
둥근 바퀴를 굴리면 해도 밀려올라가고
굳게 닫힌 찌그러진 양은솥이 눈빛처럼 빛난다
어쩌다 제 몫의 말을 삼켜버린 사내,
모음 한 가지로 서 있는 반쪽짜리 생
그 불균형을 땀으로 지탱하느라
불혹의 얼굴에 귀는 벌써 耳順이다
이순의 사내를 손짓으로 흔든다
'ㅏ', 'ㅖ' 모음 두 개가 끄덕끄덕 날아온다
자음의 빈자리에 미소를 대신하며
절름발이 단어들에 의족을 채우는 사내
빨간 고구마를 베어물면 덜그럭거리는 그의 언어는
솥 안에서 익은 정성과 그가 삼킨 따끈한 말들
내 허기를 다독인다
몸에 튼튼한 기둥하나 더 세워지는 아침
거리에 더 많은 해를 불법으로 띄우고 있던
벙어리 사내가 반짝, 빛난다
가스 불 위의 양은솥이 증기기관차처럼
사내의 하루를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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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봄, 은행 간다
은행나무 가지가 공중에
천천히 새 길을 낸다
나무가 발끝을 내밀 때마다
참았던 잎들이 팝콘처럼 펑펑
터져 나온다
바람이 헤아리는 빳빳한 잎들은
쉬지 않고 발행되는 봄날의 화폐
나무는 푸른 신권뭉치를 안부처럼 흔들며
낱낱의 이파리에 햇살을 인쇄하고
내 통장 한 페이지를 훔쳐본다
〈잔액 12500〉
발자국 수만큼 찍히는 0의 희망들
1250000000000
동그란 설렘이 무한대로 입금되는
새봄을 지폐를 헤아리며
나, 은행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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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임신
내가 써 놓은 글의 꼬리 글을 보고 있어요. 몇 개의 검은 그림자가 힐끔거리며 지나갔군요. 또는 정면으로 주사바늘처럼 나를 찔러 주셨군요, 감사해요 여러분.
내 눈에 나쁜 강아지로 변한 사람들과 돼지 몸이나 닭 머리로 은유되는 사람들이, 찢어지고 해체된 피카소의 상상들이 주사되고 있어요.
바로 선 말과 쓰러진 말 모니터의 폭주하는 말들이 목 없는 인형처럼 둥둥, 나를 타고 떠나가요, 허연 허벅지 같은 달을 향해 밀려가요.
숫자로 표시되는 IP는 당신의 처소. 우리는 모니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음 같은 욕설로 서로를 애무하고 통정하고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서로에게 베이며 검은 그림자를 수태해요, 감사해요, 여러분.
당신은 나를 나는 당신을 칼로써 욕설로써 수태했어요.
내가 누구인지 알아 맞춰봐? 맞춰봐! 케, 케, 케, 유동 IP인 당신의 처소는 PC방이군요. 음산한 웃음이 날아오는 상상의 집에서 살해를 즐기는 당신, 그리고 여러분.
목숨이 있는 것들의 특권으로 반대편에서 나는 즐겁게 피 흘려드릴게요. 내 안의 검은 아이들이 나를 찢고 태어날 때까지 나는 숙주와 먹이로써 당신들의 자식을 키워드릴게요.
내 입덧이 풍랑처럼 심해지는데 모니터는 고요한 24시, 위선 같은 평면 17인치. 거북한 배를 쓸면서 입덧을 하면서 오늘밤, 우리를 낳지 못한 현재라는 石女를 잠시 용서하기로 해요. 나를 수태하신 당신,
그리고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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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 (본명 이성배) 1968년 전남 영광 출생. 1993년 시집 『널 위한 사연…』출간. 1996년 호국문예 가작 입선. 현재 '시산맥' 회원. '시월'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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