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시와 시학 2005년 포엠토피아 신인당선작

문근영 2014. 11. 21. 16:41

시와 시학 2005년 포엠토피아 신인당선작


말의 입 (외 4편)

―곽 경 효


1
내가 쓴 말이 나를 지우기도 한다
가끔은 다시 쓰고 싶은 말도 있다

2
저수지의 고요한 수면 위를 차고 오르는 새떼들
반짝! 햇살이 날개에 실려 날아간다
가벼운 몸의 언어들이 촘촘히 얽혀
아무런 수식이나 설명도 없이
높은 하늘을 아찔하게 흔들어 놓는다
나는 단숨에 한 무리의 문장을 읽는다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린다
누가 저토록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을까
새들이 나를 끌고 간다
이제까지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말의 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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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리나무 여인숙


그 숲에는 상수리나무 여인숙이 있다
한때 저마다의 방에 불을 밝히고
끊임없이 속살거리며 사랑이 묵어가던 곳

이제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찢긴 이파리를 깃발처럼 매달고
제 발등에 패인 굵은 주름만 바라보고 있다
한낮의 햇살이 또르르 이마 위를 굴러가면
나무는 길게 하품을 한다
유일한 손님인 다람쥐들이
하늘로 난 창을 열고 저희끼리 웃는다
새 몇 마리가 굽은 등 위에 날아와 앉는다

가끔 물소리에 온몸이 젖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공연히 눈시울이 붉어져
물 속 깊이만큼의 그리움을
가만히 발밑에 묻는다

저녁 해가 그림자를 끌고 가는 소리에
새들은 엉덩이를 툭툭 털어내며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 숲,
상수리나무 가지 위에
밤마다 별들이 다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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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늦은 저녁 준비를 하다
바빠진 마음 탓인가 무디어진 칼날 때문인가
손갈가을 베었다
칼갈이에다 칼을 쓱쓱 문지르며 생각한다
스스로 일어서는 저항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살아서 부끄러운 날들에
날선 칼을 들이댄다

가끔은
악! 소리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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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정원


내 서늘한 정원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그곳에 잠시 기대어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어본다
누군가 드나들던 흔적은 아무데도 없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숨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나무의 늑골 사이에서 나는 오래 기다린다
바람도 비도 없는 밤 조금씩 살이 아파온다
어둠이 사라지고 어느새 붉은 꽃물이 터진다
달이 나무 위를 걷다가
이내 서쪽으로 숨는다

황금빛 사과를 하나 땄다
사과를 깎으며 기울어진 달을 본다
희고 둥근 침묵에 발목을 담근 채
껍질을 쓰고 나오지 않는
나무 한 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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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것은 눈부시다


1
떨어지는 것이 눈부신 까닭은
쓸쓸한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화들짝 피었던 영산홍 꽃잎이
그림자를 지우며 지상으로 곤두박질 칠 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햇빛 속으로 사라질 때
가을걷이를 끝낸 논바닥에 한 움큼의 이삭이
노을 속에서 혼자 젖고 있을 때

2
구겨진 손수건 같은 나뭇잎 한 장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무심히 스쳐간 네 눈빛이 보일 듯 말 듯
너는 이따금씩 가물가물 다가와
움켜쥔 손을 그만 놓으라 한다
제 손을 놓아버린 나무들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내 몸 속의 푸른 상처,
아직 아물지 않은 마음마저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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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효 1962년 전북 무주 출생. 2001년 「충남예술」신인상 수상. 천안여류시인동인회 회원.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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