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김준성문학상 수상작 _ 조용미 시집 『기억의 행성』
나의 매화초옥도 (외 4편)
조용미
눈 덮인 산, 무거운 회색빛 하늘, 초옥에서 창을 열어두고 피리를 불며 앉아 있는 선비의 시선은 먼데 창밖을 향하고 있다.
어둑한 개울에 놓인 다리를 밟고 건너오는 사내는 어깨에 거문고를 메고 있다
멀리서 산속에 있는 벗을 찾아오고 있다 방 안의 선비는 녹의를 그는 홍의를 입고 있다
초옥을 에워싸고 매화는 눈송이가 내려앉듯 환하고 아늑하다
매화를 찾아, 마음으로 친히 지내는 벗을 찾아 봄이 오기 전의 산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생겨나고, 부유하고, 바람의 기운 따라 천지간을 운행하는 별처럼 저 점점이 떠 있는 흰 매화에서
우주의 어느 한 순간이 멈추어버린 것을, 거문고를 메고 가는 한 사내를 통해 내가 보았다면
눈 덮인 산은 광막하고 골짜기는 유현하여 그 속에 든 사람의 일은 참으로 아득하구나
천리 밖 은은하게 번지는 서늘한 향을 듣는 이는 오직 그대뿐
밤하늘의 성성한 별들이 지듯 매화가 한 잎 한 잎 흩어지는 봄밤, 천지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나는 그림 속 사람이 된다 별빛이 멀리서 오듯 암향도 가깝지 않다
생에 처음인 듯 봄이
현통사 앞 물가의 귀룽나무는 흰 꽃을
새털구름처럼 달고 나타났지
귀룽나무, 나는 놀라 아 귀룽나무 하고
비눗방울이 터지듯 불러보았지
귀룽나무, 너무 일찍 꽃 피운 귀룽나무
귀룽나무 물가에 가지를 드리우고
바람결에 주렁주렁 흰 꽃향기를 실어 보내고 있네
귀룽나무 새초록 가지마다
연둣빛 바람이 샘솟네
개울물 소리 따라 늘어진 가지의 흰 꽃망울들이
조롱조롱 깨어나네
저 귀룽나무 흰 꽃들 받아먹는
물소리 따라 봄날은 살며시 가는 거지 또 그렇게
가는 거지 건듯건듯 봄날은 가고
귀룽나무 아래 어루만졌던 어떤 마음도
드문드문 아물어가는 거지
누군가 한 세월 서러이 잊히는 거지
아 그리고 생에 처음인 듯
문득 봄이 또 오는 거네
귀룽나무는 물가에서 전생에 피운 적 없는
흰 꽃들을 뭉클뭉클 달고서
나를 맞이하는 거네
사이프러스
나무는 풍경을 길들인다—장 그르니에
사이프러스는 마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균형 잡힌 아름다운 나무라고 고흐가 말했을 때 그는 저 나무를 빛과 색채로 감각함과 동시에 균형으로 파악했던 걸까 가지가 위로만 향하는 타오르는 촛불 같은 저 나무는 넓이 대신 깊이를 존재방식으로 선택했다
사이프러스는 언제나 검은 초록으로 불타고 있다
사이프러스가 양옆으로 도열하듯 서 있는 어느 먼 곳의 한적한 정류장에서 내 영혼은 나무들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그 기이한 풍경 속으로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사막으로 접어드는 늙은 낙타처럼 걸어 들어갔다
바람의 어느 세찬 손이 나무를 저렇게 높이 휘감아 올렸나
흩뿌려놓은 진홍색 물감처럼 펼쳐져 있는 들판의 개양귀비와 첨탑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어두운 초록빛 사이프러스 사이에서 나의 번민은 깊어갔다
막 불이 붙기 시작한 듯한 밀밭과 초저녁의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모두 저 사이프러스로 인한 것
사이프러스가 있는 풍경에는 지독한 아름다움에 대한 번민이 슬픔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 사이프러스가 층층이 쌓아올린 검은 초록의 탑은 오벨리스크보다 더 높다
허공의 악기
허공을 연주하여 소리를 낸다
허공을 눌러 연주하는
저 손가락들
현이나 구멍도 없이 소리를 낼 수 있는
테레민처럼
보이지 않는 허공의 악기를
나도 한때 가지고 있었지
허공의 음계는 놀라워라
먼 공중에서 천천히
깃털이 내려오네
높게 떠 있거나 살며시 내려앉는
저 음계들
다정한 손이 쓰다듬는
나지막한,
숨결에 숨결이 더해지는
허공의 악기를 가졌던 그때
내 손은 자주 심장 위에 얹혀 내 숨소리를
듣고 있었지 가만히
너의 심장을 어루만지듯
나뭇잎들, 허공을 연주하는 내 손을
오래도록 쓰다듬네
어두워지는 숲
숲은 어둠의 기미로 달콤하다
잣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은 내 얼굴을 빌려 저녁이 뿌리는 물뿌리개의 물방울들을 촘촘히 다 들이마신다
나뭇잎 사이마다 어둠이 출렁여도 밖으로 난 숲길 한쪽은 아직 환하다 연한 어둠의 파란에 둘러싸여 나는 몸에 천천히 붕대를 감는다
당신도 언젠가 이 숲에 왔을 것이다
숲은 폭풍의 예감으로 일렁이고 있다
당신도 이 숲에서 심장을 움켜쥐어보았을 것이다
바람이 손바닥의 붉은 꽃잎들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숲이 어두워지는 것이 내 몸의 어둠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물감이 풀리듯 어두워지며 흘러내리는 시간들,
오랜 격정으로 숲이 대낮에도 어둠을 불러들이곤 했다는 걸 당신은 알지 못하리라
당신도 여기 서 있었을 것이다
혈우병에 걸린 고래처럼 단 한 번의 상처로 멈추지 않는 피를 오래 흘리며 흰 붕대를 붉게 물들였을 것이다
어둠으로 회오리치는 붉은 숲은,
—시집『기억의 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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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등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기억의 행성』과 산문집『섬에서 보낸 백 년』이 있음. 2005년 제16회 김달진문학상, 2012년 김준성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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