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문학동네> 2005, 가을 신인 등단작 / 강성은

문근영 2014. 11. 17. 10:33

아름다운 계단

강성은


다리를 벌리고 앉은 의자 아래
졸고 있는 죽은 고양이 옆에
남자의 펄럭이는 신문 속에
펼쳐진 해변 위에
파란 태양 너머
일요일의 장례식에
진혼곡을 부르는 수녀의 구두 사이로
달려가는 쥐를 탄
우울한 구름의 손목에서 흐르는
핏방울이 떨어져내린
시인의 안경이 바라보는
불타오르는 문장들이 잠든
한 줌 재가 뿌려진
창밖의 검은 밤 속
흘러가는 기차를 탄
사내의 담배 연기를 따라
붉은 달이 떠 있는
검은 딸기밭 아래
곱게 화장한 미친 여자 뱃속에
숨겨진 계단 사이로
길을 잃은 아이가
계단을 펼쳤다 접으며 아코디언을 켜고
계단은 사람들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가고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로 계단을 하나씩 오르고
계단은 점점 더 길고 느려져
잠이 든 채 연주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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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있었다
휴일에느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 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지 않았다

— <문학동네> 2005, 가을 신인 등단작 중에서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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