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실 외 4편
박현웅
검은 먹지 한 장이 펼쳐져있는 나무 밑
저 곡선엔 가끔 분실이 잦은 곳이다
찢어진 나무 그늘이 엉켜있고
중력이 고여 있는 지점엔 간혹 늦추위가 모여 있기도 했다
불빛을 열어 간격을 밀고 가는
어둑한 저녁의 시간
오토바이 한 대가 저쪽 숲으로 사라졌고
한동안 헛바퀴가 돌았을 풍경은 며칠 후에나 발견되었다
한 대의 오토바이와 한 사람이 사라진 곳에서
한 대의 오토바이와 한 사람이 발견되었다
몇 겹의 탄력이 잠복해 있는
휘어진 그곳
속력은 직선에서 생겨나고 구부러진 곳에서 소멸한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한 사람은
막 날아오르기 직전이었을까
속력이 다 빠져나간 두 바퀴와 이제 막 냄새를 갖기 시작한 한 몸이 수습되었을 뿐
분실은 없었다
숲의 모든 소리들이
후렴으로 한동안 흔들릴 것이고
버찌가 후두둑 떨어지는 그 지점엔 잘 익은 그늘이 누워있다.
으깨진 것들의 자리는 늘 어둡고 미끄럽다.
길이 쉬는 곳은 분실도 쉬는 곳일까
묻힌 곳엔 흔적이 있지만 누군가
사라진 곳, 그 곳은 흔적이 없다
사막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반짝거리는 털을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몇 마리 신기루가 보였다
아니, 걷는 것이 아니라 건너고 있는 중이다
평생 모래를 건너도 모래를 벗어나는 일 없이
발목의 높이를 재보는 은빛여우
오래전 모래 속에서 귀를 빌려온 죄로
사막에 소리를 맡기고 다녀야하는 은빛여우
넓은귀로 입맛을 다신다.
사구의 그림자가 모래 속에서 걸어 나와 주름으로 눕는 밤
은빛여우의 눈은 빛의 껍질을 벗겨낸 말랑한 과육
소리에 민감한 어둠덩어리다
허기진 소리들이 더욱 환해지며 서로의 먹잇감이 되듯
무서운 것은 포식자가 아니라
찾아야할 작은 먹잇감이다
바람이 불 때를 기다려 식사를 끝내고
약간의 풀이 있는 곳, 여우가 제 발자국을 오래 천천히 핥는다.
작고 빛나는 사막 한 마리가 죽어있다
바람이 만들어 놓는 칼날, 서서히 날이 서가는
죽음의 속도보다 느리게 생명을 쓰러뜨린다.
여우의 몸을 떠난 숨결이 오래
은빛 털을 핥는다.
걸음을 내려놓고 날개 없이 은빛 털들이 날아오른다.
채색하는 모래바람은 일렁이는 밀밭풍이다
사막에서 살찌는 것은 바람뿐이다
버드나무를 오래 생각하는 저녁
오랜 풍력에도 물이 되지 못한 물의 족(族)
버드나무가 수맥을 찾아 가지를 흔들고 있다
부풀어 오르던 엽록(葉綠)이 소리를 깔며 비처럼 내린다.
수많은 사이가 채워져 한그루 흔들리는 허공의 물살
수심(水深)이 없는 잎들은 바닥을 알지 못한다는 듯,
푸른 물방울로 바닥을 쳐보고 싶은 것이다
나무를 업고 있는 그림자의 등이 축축하다
버드나무 그늘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듯 이리저리 옮겨 앉는 오후의 빛
올 봄 물의 길을 물어 연못을 팠다
멀지 않은 곳에 버드나무 꽃이 핀다는 계절의 일이다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는 꽃
물이 숨쉬는 것을 보고자 한 일이었다
아래서 위로 솟구치는 물줄기, 물의 줄기란 아래로 흐르는 종족인 줄만 알았다
늦은 밤 내 몸에 귀를 대는 일도
흐르는 몸의 수로를 궁금해 하는 것도 요즘의 일이다
살아서는 저 땅 속의 일가들과 면접이 없겠다는 생각.
바람도 저마다 뿌리가 달라 색색으로 물드는 나무들
저 버드나무 줄기가 바람의 골격으로 결코 땅에 닿지 않는 것은 순전히 물의 힘이다
허공에도 흐르는 물살이 있다면 저와 같을 것이다
제 몸을 물가로 끌고 가는
버드나무를 오래 생각하는 저녁이다
유서
가을이 오고 여전히 사유지로 떠있는 방들이 반갑군요. 문 안의 일들에겐 제값을 치를 수 있는 셈들이 있어 딸깍, 한 몸을 잠그기에는 그만이고요. 달빛 흘러든 방마다 물이 가득 든 달이 떠 있고 어둠밖에 벗어놓은 체념은 잘 있는지 새삼 궁금해지는 군요.
비어 있는 생각에는 빈방이 많고
그곳으로 붉은 충동 하나 투숙해 오면
생전, 죽은 것들만 목 저쪽으로 넘겼으니 죽음에 가장 익숙한 곳은 몸이겠지요. 허공에도 무게가 있어 오늘 밤 나뭇가지들은 휘어지는 소리로 바쁘군요. 같이 흔들리는 바닥의 검은 줄기들, 마지막 울음에 익사한 결심은 사후경직으로나 남겠지요.
구름이 지나가는 달의 체도
몇 개의 알약으로 잠에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꺾이지 않겠다는 듯
몸의 마지막 자세가 단단하게 굳어 있다
조서를 도우려 몇 줄 유서를 남겨 놓습니다. 세상, 처음으로 빈방에 들었다 갑니다.
봉인하지 않은 독백은 접혀진 채 조용하다
죽음이 빠져나간 자리를 닦으며 초면의 그를 떠올린다.
모든 초면은 전생의 마지막 얼굴일까
그는 후생의 눈으로 나를 보았겠다.
山役
흙냄새 나는 바람이 한 길 깊이로 분다
지관은 바람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술렁이던 풀들이 조아리며 침묵하는 오전
겹겹의 그늘을 열고
거기, 한사람이 묻히고 있다
드릴처럼 마지막 까지 멈추지 않던 기침이 빠져 나간 몸
검은 얼굴의 채탄공이었던 사내의 몸엔
마지막 까지 치닫던 그 어떤 격렬도 없다
석탄정책으로 텅 빈 갱도처럼
잔기침이 바닥나고
몸으로 통하던 모든 통로도 폐쇄되었다
평생 지하의 길에 익숙했던 그였지만
서늘한 바닥을 향하여 수직으로 내려가는 몸이 뒤뚱거린다.
늙은 아내의 울음과 한 번의 혼절이 부장품처럼 함께 묻힌다
한동안 몸보다 먼저 울음이 상할 것이고 뒤이어
몸이 썩을 것이다.
작은 알약 같은 열매를 달고 풀들이 가을을 견디고 있듯
그의 유품들이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온다
한 사람의 편도를 흰 연기가 지우며 가는 곳
그 궤적조차 허공의 저쯤에서 흩어지고 만다
숲을 막, 돌아 나오는 오후가
마지막으로 다져지고
봉긋 솟아오르는 이승의 절반을 다독이는 건 남은 사람의 일이다
서쪽으로 길을 튼 연기가
끝을 지우며 사라진다.
- 『2011 젊은 시』(문학나무, 2011)
-------------------------------------------------------------------
■ 작품 평설
찬찬한 관찰과 죽음에 대한 예의
세상에 대한 찬찬하고 깊이 있는 관찰이 인상적인 시들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가 실제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찬찬한 관찰과 어울려 자리를 잡고 있다. 삶과 죽음은 반대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바닥에 깔려있는 기본적인 욕구이자 이치이다.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등단작「사막」부터「분실」,「유서」,「산역」까지 네 편이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등단작 「사막」은 실제인지 환영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오래 굶주린 은빛여우 이야기인지 아니면 오랜 허기 속에 은빛 여우의 신기루를 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 두 가지는 사실 겹쳐진다. 시인의 환영 속에서, 굶주린 은빛여우는 평생 모래사막 속에서 먹잇감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사막을 건너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간다. 죽어 그 자신이 사막이 된 은빛여우 한 마리. 이것은 사람의 삶의 은유로 보아도 무방하다. 평생 생활의 사막에 갇혀, 먹고 살 일을 걱정하다가 탈진해 죽어가는 인생. 누구에게나 삶과 죽음의 모양은 마찬가지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 몸을 떠나가는 숨결……. 시인은 한 생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시선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간다.
「분실」에서는 어두운 숲과 거기에 얽힌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때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사람이 급커브를 처리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 죽음을 맞는 곳. 한 대의 오토바이와 하나의 죽은 몸이 치워지면, 그곳은 여전히 어둡고 미끄러운 어둠으로 남아 죽음을 기다린다. 이따금 누군가가 그곳에서 사라지지만, 누군가를 잃어버린 사람도, 죽은 이가 있던 흔적도 없다. 죽어서나 살아서나 존재감이 없는 장삼이사의 사람들. 그들은 죽음을 맞으면서 비로소 처음 자신만의 빈 방에 들었다가 간다. 죽은 자와 그 죽음을 수습하는 자. 시인은 자살한 자의 유서를 보고 시체가 있던 자리를 치우며 한때 살아있던 자의 죽음을 지켜보거나(「유서」), 이승에 봉긋 솟아오르는 무덤을 마무리한다(「산역」). 죽은 자는 말없이 치워지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 죽음을 항상 지켜보고 있는 것은 무심한 자연이다. 다섯 편의 시들은 민박집의 방, 어두운 숲, 무덤가, 사막 등 구체적인 일상의 현장과는 다소 떨어진 자연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자연은 서늘하고 무정하고 한결같은 것이다. 그 서늘함의 깊이와 그것을 끝끝내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눈. (문혜원 : 문학평론가, 아주대 인문학부 교수)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46) - 경계 없는 삶의 보법 (0) | 2014.03.28 |
|---|---|
| [스크랩] 이 아침의 시 / 강인한 - 어린 왕자 (0) | 2014.03.28 |
| [스크랩] [이영춘 론] 우주 인식의 심화 과정 / 안현심 시인 (0) | 2014.03.28 |
| [스크랩] [지상중계] 유심시조낭독회 / 오종문 (0) | 2014.03.28 |
| [스크랩] [조영일 론] 절제와 간결의 정형미학 / 이정환 (0) | 2014.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