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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영일 론] 절제와 간결의 정형미학 / 이정환

문근영 2014. 3. 28. 10:43

 

 

[조영일 론] 절제와 간결의 정형미학 / 이정환
[50호] 2011년 05월 10일 (화) 이정환 시인

1.

근간에 우리 시조문단은 꽤나 융성해지고 있다. 시조 인구가 많이 불어났고, 특히 젊은 시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져서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고무적인 일이다. 한 가지 우려할 점이 있다면 다변에 대한 경계이다. 절제와 간결의 정형미학1)의 중요성을 간과할 때 말의 낭비가 심해져서 시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에 대한 자각과 천착이 더욱 요청되는 때이다. 일군의 자유시가 도를 넘은 난해성과 산문화로 말미암아 서정성과 거리가 먼 것과 연계 지어서 생각해 볼 문제이다.

시조의 형식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한 연시조 작품들을 신인들에게서 자주 발견한다. 기본2)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탈도 필요하겠지만 정형미학을 도외시하게 되면 시조성은 소멸된다. 그런 까닭에 형식과 내용의 절묘한 조화와 균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2.

조영일 시인은 1975년 등단 이후 오직 한 길을 걸었다. 시조 하나만을 붙잡고 우직스럽게 한 우물을 파 왔다. 시집으로 《바람 길》 《솔뫼리 사람들》 《마른 강》 《시간의 무늬》 등을 펴냈고, 이호우시조문학상(1993년), 경북문학상(2001년), 경북문화상(2008년) 등 굵직한 상을 받았다. 《시조21》 편집위원, 이육사문학관 관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수석부회장, 경북문인협회장 등의 공적인 일들을 통해서도 시조문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중이다.

먼저 단언할 수 있는 점은 그의 작품 세계는 개인적인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즉 개인사를 넘어 시대와 역사에 대한 자각과 인식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시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열린 의식을 가지고 시작에 임하고 있다는 한 방증이다. 서정 일변도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은 특히 시조를 쓰는 시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사실 그간 적잖은 시조시인들이 자연 예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작품으로 치열하게 응답하고 반응하는 일은 소중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언어 운용 면에서 특유의 절제력을 보인다. 모든 작품이 아주 간결하다. 간명한 필치로 표출된 일견 냉엄하기까지 한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진술은 그의 시 세계의 중추적인 특장이다. 즉 균제미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시편들은 높은 성취도를 획득하고 있다.

먼저 그의 등단작(1975년)을 보자.

씻어도 배어드는/ 먹물 같은 목숨을 입고// 가시로 박힌 멍을/ 뿌리로 쫓으면서// 적막한 하늘을 짖고/ 허공 속을 나른다.// 깊은 삶 가지 끝에/ 바람소리 차오르면// 무거운 몸짓으로도/ 벗지 못할 이 罪業을// 뽑아서 깃털 하나로/ 떨꿀 수는 없는가// 思念은 한줄기 소나기/ 山과 들을 다 적셔도// 끝내 둘 곳이 없는/ 외로운 이 한 生을// 오늘도 나래에 감추고/ 저문 날을 앉는다.
―〈까마귀〉 전문

치열성이 엿보인다. 죄업이니 사념이라는 시어가 다소 거슬리기는 하나 삶에 대한 번뇌의 흔적이 역력하고 형상능력이 돋보인다. 또한 신인으로서 당찬 도전정신을 읽을 수 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언어를 다루는 표현 기법은 오늘날과도 큰 차이가 없음을 본다. 시인의 내면을 면면히 흐르고 있는 남다른 시 정신 때문이리라.

사람이 그리운 날
운주사 찾아가면

조금씩 모자라는 삶을 끌어안은

알 듯한 그 얼굴 모습
닳아 눈물
겨웁다.

어느 것 하나 성하지 않은
눈 코 귀 입

그래도 너그러움 잃지 않고 지니고 선

운주사 석불 앞에서
마주한 몸
저리다.
―〈운주사〉 전문

특집에 없는 작품이다. 극도로 언어를 절제한다. 운주사 석불의 얼굴 모습을 두고 “금가고 으깨어진 삶을 끌어안은”이라고 형용한다. 흡사 세상을 살 만큼 산 한 사람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성하지는 못하지만 너그러움 잃지 않고 있는 석불 앞에 서니 자신의 몸이 별안간 저려 온다고 토로한다. 몸이 저린 것은 갖은 풍상을 겪은 석불과 비견되지 못할 자신의 삶을 문득 생각하다가 불시에 일어난 반응이리라. 석불의 너그러움에서 우리는 결국 삶의 참된 지향을 오래 반추하게 된다. 사소한 것에서 인생의 뜻을 발견하는 일은 이렇듯 귀한 것이다.

다음 두 작품을 보자.

하늘 부끄러운/ 피여 달아올라라/ 눈물 반 섞여 흐르는 사월의 흙바람 속/ 덧없이 살아남아서/ 진달래꽃 따문다.
―〈사월 이후〉 전문

광주로 가는 날 아침 굵은 비가 내렸다/ 산 자가 죽은 이에게 바치는 눈물이라며/ 함께 간 친구가 혼자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살아서 말하지 못한 비굴함 탓이었을까/ 입 벌려 내리는 비 무작정 받아 깨물며/ 축축이 피에 섞이는 비를 맞아야 했다/ 망월동 가지런한 무덤에 와 비로소/ 턱없이 고개 숙이고 손 모아 쥔 부끄러움/ 내리는 비를 맞으며 씻고 또 씻는다.
―〈망월동에서 띄우는 엽서〉 전문

두 편은 사회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사월 이후〉와 〈망월동에서 띄우는 엽서〉는 시차가 꽤 있지만 모두 우리 사회의 매우 중요한 역사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월 이후〉는 단시조로서 시적 화자가 하고자 하는 모든 말들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그렇다. 해방 이후 우리의 역사는 하늘 아래 부끄러운 일들로 점철되었기에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그러하기에 피는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언제나 사월의 흙바람 속에는 눈물이 반쯤 섞여 흐른다. 그날 이후이다. 그 뒤로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는 부끄러움의 되풀이였기에 더욱 그러하다. 고통은 언제나 살아남은 자의 것이기에 그 덧없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진달래꽃을 따서 입에 물고 있다. 여기서 ‘진달래꽃’이 상징하고 있는 바 그 의미는 큰 울림을 가진다.

〈망월동에서 띄우는 엽서〉는 ‘광주민주화항쟁’을 노래하고 있다. 특히 “살아서 말하지 못한 비굴함 탓”을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뼈아픈 자성이다. 그렇기에 입을 벌려서 내리는 비를 받아 깨물며, 축축이 피에 섞이는 비를 맞았을 것이다. 광주로 가는 아침에 비가 내렸고, 함께 간 친구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바치는 눈물이라고 애써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굴함 혹은 부끄러움에 대한 면피를 하고 있다.

무덤 앞에서의 묵도 위로 비는 연이어 내려 부끄러움을 씻는다. 어찌 남김없이 다 씻기기야 하겠는가.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자성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사월 이후〉에서 “따 문다”와 〈망월동에서 띄우는 엽서〉에서 “무작정 받아 깨물며”는 묘하게도 그 맥이 상통하고 있다. 깊은 성찰에서 비롯된 진실한 표현들이다.

그의 사회적 상상력은 다음 작품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살처분 어미돼지/ 눈을 부릅뜨고// 다가온 어린새끼 주둥이로 밀쳐낸다// 가까이 오지 말라며/ 고개 크게 흔든다// 오면 죽는다고/ 두 눈 껌뻑이며// 조용히 숨죽이고 누운 어미 돼지// 마지막 가는 눈 위로/ 진눈깨비/ 내린다.
―〈구제역〉 전문

청송군 진보를 지나/ 영양으로 가다보면/ 철조망 둘러친 흰 건물 멀리 보인다/ 죄 지은 사람 가둬둔 청송 제1감호소다/ 사형장 오명이 싫어 지역민이 들고 일어나/ 형 집행 장소가 되는 일은 면했지만/ 근접이 아주 어려운 세상 밖의 곳이다/ 죄지은 이들 끌어다 가둬둔 곳이라서/ 두려운 마음을 하고 사람들 지나다니는 곳/ 그럴까 꼭은 그럴까/ 정말 무서운 사람들일까/ 오붓한 산자락에 기대 하늘에 닿아 있는/ 창문 없는 집 향해 알 수 없는 물음 결빙한/ 철조망 그보다 높은/ 영혼의 벽 만난다.
―〈감호소를 지나며〉 전문

〈구제역〉은 지난해 우리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역병 이야기이다. 마지막 길을 가는 어미돼지의 모성애를 아프게 그리고 있다. 다가온 어린 새끼를 주둥이로 밀어낸다. 함께 죽을 수는 없다는 어미돼지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새끼 사이에서 인간은 할 말을 잃는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살처분뿐이다. 하늘도 어떻게 할 수 없는지 진눈깨비를 내린다.

〈감호소를 지나며〉는 청송감호소3)에 대한 소견이다.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결코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는 말을 넌지시 하고 있다. 지역이기주의를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만, ‘청송’ 하면 청정 농어촌으로 으뜸가는 곳인데 그곳이 형 집행 장소가 된다는 것은 그 지역 사람으로서는 쉬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오붓한 산자락에 기대 하늘에 닿아 있기에 그곳 사람들의 영혼은 갇혀 있음만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내적 정화에 도움이 될 듯하다.

오랫동안 격리·수용됨으로써 큰 변화를 겪는 인격체도 적지 않겠지만, 그로 말미암아 더욱 황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의 화자는 갇힌 자와 자유로운 자의 경계에 대하여 은연중 말하면서 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영혼의 벽”을 생각한다. 이 시편은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창작된 것이 아닌 만큼 이러한 잔잔한 울림을 안겨주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뜰에 혼자 싹 터/ 안쓰러이 크고 있는/ 완두콩 어린 줄기 맘에 걸리시는지/ 짚고 온 헌 나무짝지/ 곁에 세워 두셨다/ 푸른 하늘 아래/ 목숨 소중한 일/ 어디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어머니 세워놓으신/ 지팡이가 보여준다.
―〈지팡이〉 전문

시의 화자는 묘한 장면과 마주치고 있다. “뜰에 혼자 싹 터/ 안쓰러이 크고 있는/ 완두콩 어린 줄기”를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신 어머니가 “짚고 온 헌 나무 짝지/ 곁에 세워 두”신 것이다.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푸른 하늘 아래/ 목숨 소중한 일”이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느꺼워한다. “어머니 세워놓으신/ 지팡이”가 무슨 푯대나 표석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준 때문이다.

이렇듯 어머니의 의지가 되는 “지팡이”가 “완두콩 어린 줄기”의 기댈 힘이 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어머니와 완두콩 어린 줄기 사이의 교감 즉 바이오필리아4)의 세계가 눈물겹다. 우리의 때 묻은 인간성에 물기를 얹고 있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꽃을 피우고 있다// 잊은 기억까지/ 조용히 되돌아 와// 화평한 숨결 고르며 향기 뿜어 나른다.// 먼 길 밟아오는/ 선명한 노래 소리//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끝을 향해// 하늘과 땅이 하나로/ 눈부신 꽃 피운다.
―〈눈 오는 날〉 전문

참으로 평화로운 세계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온전한 합창이 고요히 울려 퍼진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는 강설은 잊은 기억을 되살리고, 화평한 숨결 고르며 향기 뿜어 나르기까지 한다. 더불어 “먼 길 밟아오는/ 선명한 노래 소리”도 듣는다. 그것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 끝”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그 시간 그 속에서 사람도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눈 오는 날〉은 다음 두 작품과 연계 지어 읽을 수 있다. 맥이 통하기 때문이다.

봄날 강이 풀려 조용히 흐르는 것은/ 들려줄 그 사람을 향한 혼이 살아/ 영하의 기온 아래서 버티어 온 한이다./ 아무 생각 하나 가질 수 없는 엄동/ 죽은 목숨으로 이어 온 눈물겨움/ 따뜻한 봇물이 되어 반짝이며 가느니./ 하늘 아래 단 하나 남겨진 말 그리움/ 춥고 긴 겨울 밤 온 몸으로 감싸/ 이 봄날 그대 곁으로 다가가는 혼이다.
―〈흐르는 강〉 전문

키 큰 나무들 아래 들려오는 재잘거림// 바람아 불어 봐라/ 누가 흔들리나/ 키 작은 나무들 모여 가지 어루만진다// 애써 매단 잎 놓지 못하는 키 큰 나무/ 온 몸에 실린 무게/ 가다듬지 못하고// 불어온 바람에 종일 흔들려 살 뿐이다// 키만큼의 크기로 바람을 안고 사는// 숲에는 나무들이/ 뿜는 잎새 술렁임// 사는 일 가볍지 않은 재잘거림 만난다.
―〈나무들의 풍경〉 전문

〈흐르는 강〉과 〈나무들의 풍경〉은 잔잔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안으로 흐르는 도도한 생명력은 우리의 눈을 씻어 준다. 영혼을 맑게 한다. 봄날의 강은 들려줄 그 사람을 향한 혼의 살아 있음이라고 단정한다. 그렇기에 영하의 나날들을 꿋꿋이 버틴 것이다. 그리하여 따뜻한 봇물이 되어 반짝일 때 우리의 영혼마저 그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다.

겨울을 견딘 자에게 주어진 크나큰 선물이다. 그것을 자각한 화자는 마침내 “하늘 아래 단 하나 남겨진 말 그리움”을 떠올린다. 기실 “춥고 긴 겨울 밤 온몸으로 감싸/ 이 봄날 그대 곁으로 다가가”게 만든 것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혼이다. 시의 화자는 애써 그것을 강조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나무들의 풍경〉은 〈흐르는 강〉과 연계 지어서 읽을 수 있다. 물의 기운을 듬뿍 받은 나무들은 싱그러움을 한껏 발산한다. ‘나무들의 풍경’에서 사람살이를 본다. 사람살이와 나무들의 어우러짐의 생태는 많이 닮아 있다. “키 작은 나무들 모여 가지 어루만진다”는 표현은 예사롭지 않다.

서로 헐뜯거나 다투거나 힘겨루기를 하지 않고 어루만져 주고 있다는 것은 상생의 삶이다. 키 큰 나무가 바람에 종일 흔들려 사는 일은 필연적이다. 숙명이다. 그러므로 흔들린다는 것은 순명 즉 순복의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키만큼의 바람을 안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그것을 능히 견딜 수 있는 내적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무들이 뿜는 잎새 술렁임”은 생명 그 자체이다. 결구에서 화자는 깨달음의 구절을 보인다. 즉 “사는 일 가볍지 않은 재잘거림 만난다.”이다. 재잘거림은 잎새들일 수도 있고, 숲의 전면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새들의 지저귐일 수도 있으며, 숲 속으로 모처럼 나들이 온 사람들의 속삭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무들의 풍경〉에서 자연과 사람의 경계 지점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읽은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수확이다. 거기에다가 〈흐르는 강〉에서 “하늘 아래 단 하나 남겨진 말 그리움”의 힘까지 함께 느꼈으니, 내적 열락을 함께 맛본 셈이다.

이러한 생명시학적 육화는 조영일 시조시학의 한 진면목이다.

3.

지금까지 이번 특집 수록 작품들을 중심으로 시인의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그의 전모를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자선작과 신작들을 통해 그가 어떠한 창작 방향과 시 정신으로 일관해 왔는지를 일별하게 되었다.
특히 조영일 시인은 소음보를 즐겨 다룬다. 이것은 다분히 내적 절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간결미를 드러내기에 알맞은 형식인 소음보를 자주 활용하고 있는 까닭은 절제를 중시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생래적으로 장광설을 배제하고자 하는 듯하다.
다음 예들을 살펴보자.

조금씩 모자라는 삶을 끌어안은

하늘 부끄러운/ 피여 달아올라라

바람아 불어 봐라/ 누가 흔들리나

살처분 어미돼지/ 눈을 부릅뜨고

오면 죽는다고/ 두 눈 껌뻑이며

뜰에 혼자 싹 터/ 안쓰러이 크고 있는

푸른 하늘 아래/ 목숨 소중한 일

잊은 기억까지/ 조용히 되돌아 와/ 먼 길 밟아오는/ 선명한 노래 소리

아무 생각 하나 가질 수 없는 엄동/ 죽은 목숨으로 이어 온 눈물겨움

춥고 긴 겨울 밤 온 몸으로 감싸

바람아 불어 봐라/ 누가 흔들리나

위의 많은 예에서 보다시피 이러한 경우가 그에게는 잦다. 때로 이로 말미암아 한 음보가 모자라는 듯한 구조를 보일 때도 있다. 그만큼 축소지향적인 태도가 강하다. 특유의 간명한 형식과 더불어 항상 참신한 이미지의 축조에 힘쓰고 있다. 개인적 상상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시편에서도 신선한 이미지의 동원으로 시의 완성도를 높인다. 시조문단에서 이 점에서는 가장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그만의 시각과 그만의 문체로 지금까지 이룩해 온 조영일 시조시학은 다시 한 번 꽃피울 연대를 맞고 있음을 확신한다. 이번 특집 작품들이 그것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 이순을 훌쩍 넘겼으나, 미적 장인(匠人)으로서 그의 시어는 활달하고 그의 시선 또한 젊기에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 세계에 대해 기대를 해도 좋을 것이다.

연조가 깊어질수록 더욱 뛰어난 작업을 보여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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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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