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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영춘 론] 우주 인식의 심화 과정 / 안현심 시인

문근영 2014. 3. 28. 10:45

[이영춘 론] 우주 인식의 심화 과정 / 안현심
[50호] 2011년 05월 10일 (화) 이영춘 시인

1. 들어가기

조지훈은 그의 《시론》에서 시론을 아는 것이 시 창작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하였다. 시의 본질은 시를 짓고 고민하는 중에 저절로 터득되는데, 이것은 생명 잉태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각도에서 ‘시인은 탄생하는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물음과도 맥락이 닿는다.

 

더불어 그는 시인이 될 수 있는 재질을 느낌의 예민성, 생각의 천진성, 노력의 심각성이라고 언급하였다. 예민하게 사색하는 가슴과,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성, 사물에 대한 미적 탐색의 눈을 타고나야만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조지훈의 논의에 30%의 시론을 겸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아무리 시인의 재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기법을 연마하지 않으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없고, 기법에 능해도 시혼이 부재하면 황폐한 말장난의 집만을 지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정신(poetry)을 거쳐 시(poem)로 형상화되기까지는 시론의 뼈대에 시혼의 살이 조화를 이뤄야 좋은 시로서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시란 무엇이며 어떠한 자세로 어떻게 써야 하는가? 시인은 시를 쓰기에 앞서 시를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곧 삶에 대한 사랑과도 연결된다. 어떤 일을 사랑하여 오랜 세월 ‘올바르게’ 나를 주는 것은 맑은 정신의 길에 들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학문이나 그림, 음악 또는 구두닦이, 행상을 오래 해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시 창작 기법을 가르치는 전문기관이 생겨나면서 시인의 가슴을 지닌 시인보다는 언어 마술사적인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시는 말을 위한 말들의 미로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시를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기법적 측면에만 치중한 결과일 것이다.
이영춘의 시를 정독하는 동안 ‘시인은 탄생하는가, 만들어지는가’에 골몰해 있다가 시집을 덮을 무렵, 이영춘은 만들어진 시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시에는 현란한 수사가 등장하지 않으며, 시적 감성이 비틂 없이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법적인 시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의 시가 살아남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이와 같은 물음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읽어가기로 하겠다.


2. 자아인식의 확장 과정

시인들이 시세계를 변모시켜 가는 과정은 시적 고민의 무게와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시인으로서 출발할 때는 자아 찾기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후 차츰 시선을 돌려 타자들을 주시하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나와 타자와 우주의 관계를 천착하면서 조화로운 우주의 그물망에서의 존재를 인식하기에 이른다. 이영춘 시의 변모 양상도 이와 같은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저 하늘만큼 맑을 수 있다면
저 구름처럼 신비로울 수 있다면
저 산처럼 그윽할 수 있다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으리

쳐다 보아도 굽어 보아도
울렁이는 가슴일 뿐
한 마리 발붙인 땅의 미물,
밤낮으로 죄 한 가지씩 더해 가며
구원이듯 빈 가슴으로
시를 쓴다
시를 읊는다


―〈사물 인식〉 전문

 

위 작품은 제3시집인 《귀 하나만 열어놓고》(문학세계사, 1987)에 상재된 작품이다. 2011년 현재 열 번째 시집을 내놓은 점을 감안한다면, 초기 작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시적 자아는 “저 하늘만큼 맑을 수”도 없고, “구름처럼 신비로울 수”도 없으며, 산처럼 그윽하지도 않은 결핍된 ‘자아’를 발견한다. 아무리 쳐다보고 굽어보아도 “밤낮으로 죄 한 가지씩 더해가며”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한 마리 미물만이 인지될 뿐이다.

 

결국 “벌레,/ 벌레,/ 밥을 먹는 벌레”로서 자아를 인식한 시인은 “내가 만약 이슬을 먹을 수 있었다면” “이 땅에/ 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시인은 새가 되지 못하였고, 나비가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슬을 먹고 살 수도 없기 때문에 땅을 기어 다니는 벌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슬을 먹을 수 있다면〉). 이와 같은 인식은 좀 더 고매한 존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체험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될 것이다.

 

시인의 초기 작품은 이처럼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탐색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결핍된 자아를 발견해 가는 자아인식과 맞닿아 있다. 시인은 결핍된 자아를 발견할 때마다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시를 써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영춘 시 쓰기의 출발점은 개인 구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영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인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양상이기도 하다. 많은 시인이 개인의 결핍과 상처를 시 쓰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치유해 온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족보를 보다가
족보 속에 바람처럼 누워 있는
나를 보았다.
이름 두 자는 간 데 없고
시집 보낸 아버지의 名 字 아래
실뿌리처럼 겨우 매달린
“李氏”라는 성뿐.
내 살아온 무게보다
엮어온 역사보다
아득히도 작은 여자의 무게.


―〈여자의 족보〉 일부

 

고려 말에 유입된 유학사상은 국가와 사회, 가정의 질서 체제에 지대한 변혁을 가져왔다. 현대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부장제 사회문화는 이때부터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정의 명예와 뿌리를 중요시한 가부장권은 가계의 내력을 족보에 기록하면서 여성의 존재를 ‘○○김씨’ ‘○○박씨’ 등으로만 기재해 왔다. 여성은 남편의 직책에 따라 그 호칭이 달라질 뿐, 독자적인 직책과 호칭을 얻을 수가 없었다. 여성의 임무는 철저히 남성의 뒷바라지 역할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어느 날 족보를 보다가 아버지 함자 아래 성씨만 기재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족보 속에 바람처럼 누워 있는/ 나를 보았다.”라고 형상화한다. 그것도 동일한 크기와 굵기로서의 글씨가 아니라, 실뿌리처럼 작고 가늘게 ‘이씨(李氏)’로만 매달려 있다. 그동안 공부하고 시를 쓰면서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건만 “내 살아온 무게”와 “엮어온 역사”에 비해 너무나 빈약한 존재를 목격하며, “아득히도 작은 여자의 무게”를 실감한다.

 

시인의 허탈감과 슬픈 감정은 “이조의 바람이/ 이조의 선율이/ 어머니의 혼으로/ 할머니의 넋으로/ 다시 살아나/ 내 족보 위에서 온통/ 통곡의 강을 이루고 있”다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시인은 자신의 비애를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족보에 존재감이 미약한 것은 어머니와 할머니로 환기되는 한국의 여인들이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시인의 자아인식과 관련이 깊다. 앞에서의 자아인식이 결핍된 존재로서의 자아인식이었다면, 이 작품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아인식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 비판의 목소리가 좀 더 밀도 있게 채색되었다면 페미니즘을 구현하는 작품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인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데 시인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3. 인간소외의 현장 보고서

초기 작품에서 자아 탐색에 몰두하던 시인은 고개를 들어 주변의 타자를 응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시인을 둘러싼 타자들은 ‘나’와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는 존재 혹은 사건들이다.

 

 

밭고랑만큼이나 주름 잡힌/ 내 어머니 같은 한 아낙네가/ 밭고랑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 일 년 내 손톱이 빠지도록 지은 농사가/ 모두 빈 쭉정이란다
씨앗을 권장했던 나랏님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난 자꾸 눈물이 난다 1〉 일부

아무나 갈 수 없는 그 도시에/ 검은 수증기 떼들이 슬픔처럼 떠 있다/ 동두천의 나라, 그 나라/ 자본주의자들이 흘린 정액들이/ 지천으로 출렁거리는 거리
―〈난 자꾸 눈물이 난다 2〉 일부

 

〈난 자꾸 눈물이 난다〉 1·2에 등장하는 농부와 양공주는 동일하게 물질문명에서 소외된 존재들이다. 내 어머니 같은 농사꾼은 관련 기관의 권고를 받아들여 손톱이 빠지도록 농사를 지었건만 결국 빈 쭉정이만 건지게 된다. 관련 기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좋은 품종의 씨앗을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농부들이 재래식으로 농사를 지은 것보다도 나쁜 결과를 낳았지만, 그들은 농사를 망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하소연할 곳이 없는 농부는 밭고랑에 주저앉아 울고, 그 광경을 목격한 시인만이 눈물이 날 뿐이다.

 

두 번째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양공주들이 집단 거주하는 ‘동두천’이다. 외국인들의 자본을 얻어내기 위해 양공주들은 몸을 팔고 정신을 판다. 동두천 거리는 “자본주의자들이 흘린 정액들이/ 지천으로 출렁거”리고, 그러한 광경을 목격한 시인은 비애감에 젖는다.

 

물질문명은 인간소외를 과속화시키는데, 작품 1의 농사꾼은 자본을 축적하기에 역부족인 환경에 처해 있으며, 작품 2의 양공주는 물질을 얻기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인물이다. 거대 자본이 시장을 지배할수록 인간은 자본에 종속되면서 사물화될 수밖에 없다. 대항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시인은 그저 눈물이 날 뿐이다.

 

한편, 시 〈당신의 얼굴―흙 4〉에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 먼 조상들까지도 괭이와 삽을 들고 밭고랑을 걸어가는 모습이 형상화된다. 이들이 “흰 옷 입은 사람들”로 환기되는 것은 ‘백의(白衣)민족’으로 불려 온 우리 민족을 은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농기구를 들고 밭고랑을 걸을 때는 물결인지 눈물인지 모르는 단순세포가 출렁거리는데, 시인이 그들의 눈물을 단순세포로서 은유한 것은, 물질문명 이전에는 눈물조차 단순하고 깨끗했다는 믿음에서 근거한 상상력이 될 것이다. 힘든 노동 속에서도 그들은 웃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밭고랑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도시의 바람만이 걸어 들어와” 아버지의 얼굴을 밟고 섰을 뿐이다.

 

1960~70년대에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산업화는 농어촌의 공동화 현상을 가져왔다. 젊은이들이 자본을 좇아 도시로 떠나자 농어촌은 노인들만 남게 되는데, 〈당신의 얼굴―흙 4〉는 그와 같은 세태를 고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눈에 띈 별꽃무늬,
지퍼 앞문에 흥건히 새겨진 오줌발 꽃무늬, 그 무늬 고운 꽃잎,
정작 본인은 그 꽃잎 그려진 줄도 모르고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를 목청껏 소리 높이 부른다.
목청 속에 묻어나는 그 쓸쓸한 마이너,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날은 저물고.

―〈오줌발 별꽃무늬〉 일부

 

시인은 어느 날 모 일간지 기자였던 선배를 만나 노래방에 가게 된다. 노래방에 가자마자 화장실 출입이 잦던 선배는 기어이 “지퍼 앞문에” “오줌발 꽃무늬”를 새기고 만다. 우연히 눈에 띈 바지 앞문의 오줌 얼룩을 시인은 “무늬 고운 꽃잎”으로서 환기한다. 바지 앞자락에 오줌 얼룩을 새겼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슬픔을 함의하는바, 젊을 때는 힘 있던 오줌발이 발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은 성 기능의 저하로까지 확대되기 때문이다.

 

신체기관의 노화 현상이 확연한데도 인간의 기억은 젊고 아름다웠던 시간만을 추억한다.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내면성의 중심에 자리 잡은 채 시인의 정신세계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선배 역시 추억을 자양분 삼아 목청껏 노래를 부르지만, 이영춘은 그 목청에서 쓸쓸한 타자의 모습을 읽어낸다. 타자의 행위를 방관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말이다.

 

시 〈오줌발 별꽃무늬〉에 나타나는 소외는 앞의 작품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앞의 작품이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소외라면, 〈오줌발 별꽃무늬〉는 유한성을 지닌 인간이 피해 갈 수 없는 생명현상에서의 소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4. 우주와의 합일의 몸짓

시인의 시세계가 궁극적으로 심화되면 자연의 그물망 속에서의 존재의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시인의 혜안은 깊고 넓어져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조화로운 세계를 체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님 한 분이/ 타박타박 산비탈을/ 걸어가신다// 작년 가을/ 산 속으로 떠난 아버지 뒷모습/ 환히 보인다
―〈노을―우주를 지고 가는 사람〉 일부

 

위 작품은 한 폭의 산수화인 듯 선명한 그림을 제시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스님 한 분이/ 타박타박 산비탈을” 걸어가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렇게 걸어가는 스님의 모습 위에 “작년 가을/ 산 속으로 떠난 아버지 뒷모습”이 오버랩된다. 아버지는 작년 가을에 돌아가셨지만 스님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환영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아버지와 스님이 동일한 존재자의 위치를 획득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스님은 각각 태생이 다르고 삶이 다르지만 우주 속에서 동궤의 생명체로서 환기된 것이다.

 

 

때로 방안에 가만히 누워 있을 때면 마치 내가 관 속에 누워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관속 천정에서 들리는 소리, 소리들의 방출,
째깍째깍 초침 돌아가는 소리, 내 맥박 뛰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창 틈새로 햇살 지나가는 소리,
얼마 전 이 지상의 문을 닫고 떠난 한 시인의 눈물 흐르는 소리,
그 눈물에 젖어드는 잔디, 검은 잔디의 묘지,
묘지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 그 문으로 또 누군가가 들어가는 소리……
―〈방(房)의 이중법〉 일부

 

이영춘은 방 안에 누워 관 속의 상황을 상상하지만, 방 안만이 아닌 내 삶의 반경이 관 속일 수도 있고, 이 우주가 거대한 관으로 상정될 수도 있다. 우리의 삶은 작은 관, 큰 관 속에서 삶이라는 임무를 다하는 과정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시인의 상상력이 여기까지 이르면, 우주의 온갖 현상과 소리를 인지하고 들을 수 있게 된다. “창 틈새로 햇살 지나가는 소리,/ 얼마 전 이 지상의 문을 닫고 떠난 한 시인의 눈물 흐르는 소리”와 “그 눈물에 젖어드는” “묘지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를 듣게 될 뿐 아니라, “그 문으로 또 누군가가 들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묘지의 문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간다는 표현에서 ‘또 다른 누구’는 바로 ‘나’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는데, 이와 같은 형상화는 유한한 존재들의 생멸의 법칙을 인지할 때만이 가능한 상상력이 될 것이다.

 

 

길바닥에 웬 숟가락 하나가

떨어져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심히 밟고 간다

누군가 한 생애

담금질하던 입

많이 아프겠다

언뜻 한 솥 밥을 먹던 얼굴 하나가

찌그러진 숟가락에

겹친다


―〈길에 누워 있는 입〉 전문

 

 

숟가락은 인간의 목숨을 유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물건이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인간은 숟가락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숟가락에 대한 형상화에서 시인은 한 생애를 담금질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담금질’의 정확한 의미는 쇠붙이를 녹여 원하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불에 달궜다가 찬물에 담그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이른다. 시인은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빼는 행위가 되풀이되는 과정을 ‘담금질’에서 유추해 온 듯하다. 이와 같은 유추는 길바닥에 버려진 숟가락이 고단한 목숨으로 환기되기 위한 기법으로 작용한다.

 

숟가락의 고유한 의미는 확장되어 자신이 드나들던 ‘입’으로 환유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길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숟가락을 보고 시인은 누군가의 입이 많이 아프겠다고 생각한다. 우주적 상상력은 형상의 고착화를 지양한다. 사물들은 그 본질을 구성하는 원자를 주고받으며 형상을 생성시키고 소멸해가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물과 바람[기(氣)]과 흙과 불로서 소멸하지만, 그 원소들은 다른 사물의 형상을 짓는 데 이용된다. 따라서 우주적 상상력 안에서는 숟가락이 입이 될 수도 있고, 돌이 나무가 될 수도 있으며, 사람이 호랑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5. 나가기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야 한다. 인간도 여러 각도에서 가치가 환산되어야 하고, 예술 역시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시는 두 갈래의 시장을 보유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일반 독자들이 소비자가 되는 서점이라는 시장이고, 또 하나는 계간지 혹은 월간지에 포진되어 있는 시인 혹은 평론가들로 형성된 시장이다.

 

서점에서 잘 팔려나가는 시는 대부분 시인의 재질에 의탁하여 쓴 시들이 많고, 전문인들이 좋아하는 시는 주로 창작 기법에 의존하여 쓴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필자는 한 마디로 어느 시장의 상품이 더 좋은 것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예술품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는 일반 대중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시의 존재 가치가 더욱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각 존재의 이유를 충분히 지닌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기준은 존재한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전문 독자들을 겨냥한 시라 하더라도 머리로만 지은 말의 집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일반 독자들을 겨냥한 시라 할지라도 기교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시인의 가슴과 시론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만이 좋은 시를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춘의 작품은 가슴으로 만들어진 시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특징이 독자들에게 좋은 시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 만큼, 시인의 작품 마디마디에는 따스함이 배어 있다. 이러한 논의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읽어간다면, 이영춘 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안현심 | 문학평론가. 2010년 《유심》으로 등단. 현재 한남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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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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